
컨택트
W.청유(@Cell_Chung_U)
네게는 몇 가지 습관이 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주제에 대해 고민할 때면 손끝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것. 나를 보기 직전에 잠깐 바닥으로 시선을 한 번 떨어뜨렸다가 들어올리는 것. 비가 오는 날에는 분석을 시작하기 전 평소보다 조금 단 음료를 마셔 둔다는 것. 너는 손끝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찰나 시선이 아래로 흐르게 둔다. 네가 타 놓은 차가운 유자청 컵 표면에 옅은 물기가 맺히고 있다. 나는 네가 비가 오는 오늘 분석을 시작하기 전, 마음에 들지 않는 주제를 고민하다 떠오른 생각을 내게 말하기 직전이라는 걸 공들이지 않고도 직감한다. 너와 함께 보내 온 시간들이 축적되며 생긴 직관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과거에 의한 판단일 테다.
하지만 너는 이제 이렇게도 말할 것이다. 후배님, 생각해 봤는데요. 어쩌면 우리가 발화 예시마다 격표지를 너무 의식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굳이 문법에 과한 제한을 걸 필요는 없겠어요. 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가로챌 수 있을 만큼, 네가 말할 문장을 이미 알고 있다. 너는 몸을 일으켜 네게 다가와 살짝 허리를 숙이고 네가 보던 조형판을 손으로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그것이 인류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둘 중 하나는 그 끝을 보진 못할 테다. 이 모든 사실들에 대한 나의 지식은 예언처럼 허무맹랑한 부류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어떤 마법적인 과정을 거친 것도 아니다. 방금처럼 과거에 의한 판단이나 너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알려 준 경험적인 직관 때문도 아니다. 이건 내 사고방식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들은 끝과 함께 시작하고, 어떤 이야기들은 시작과 함께 끝을 맺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길항하지 않지만 동일시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난 전체를 파악함으로써 시작과 끝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의 감각을 안다. 미래를 통찰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는 이유를 안다. 우리의 발화에는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나는 이미 네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고 있다.
“…… 대? 문대문대,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지? 우리 오 분 뒤에 들어갈 거야.”
알아. 박문대는 아직 꿈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머릿속을 의식적으로 일깨우며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설령 정신이 다른 데에 팔려 있다 한들 그걸 티내면 티낼수록 성가시게 구는 녀석이야말로 이세진이라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나직한 한숨과 함께 살짝 거뭇해진 눈가를 문지른 박문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뒷통수 언저리와 관자놀이께가 뻐근한 걸 보면 피로감이 가실 일은 요원한 모양이었다.
“많이 피곤해? 요새 계속 쪽잠만 자는 것 같더니.”
“이 시기에 안 피곤한 연구원도 있나. 상부에서 징그러울 만큼 갈군다면서.”
“그건 그렇지만. 성과가 그렇게 금방 나오는 건 아닌데 말이야. 이거 청우 형님이 말씀해 주신 건데…….”
요새 심상찮대. 성질 급한 간부들이 특히. 무슨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은근하게 고개를 기울인 이세진은 귓가에 골똘하게 소근거렸다. 아니, 방점이 찍혀야 하는 건 심상찮다는 기류가 아니지. 그래서 최악의 상황에 그쪽이 어떤 조치까지 감행할까, 에 더 가깝지 않나. 박문대는 그렇게 생각하며 정신을 마저 차리고자 눈을 느슨히 몇 번 깜빡였다. 본래가 꿈이나 선잠을 잔 전날 새벽 같은 것들에 쉽게 휘둘리는 컨디션은 아니었을 텐데, 근래의 일들만큼은 끈적한 풀이라도 발라 둔 양 의식과 맞붙어 그림자마냥 야금야금 쫓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왜 그 새끼냐고.
짜증스러운 한탄처럼 짧게 앓는 소리를 삼켰다.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연구 대상과 연애하는 꿈을 꾸는 정신 나간 연구자가 다 있나. 처음 유리벽 너머에서 그를 마주쳤던 순간 느꼈던 기묘한 기시감만 해도 충분히 거슬렸는데. 데자뷰부터 시작해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같은 진부한 대사에 낭만을 갖고 살기엔 매 분 매 초 현실이 과도했으므로 마뜩잖은 게 당연했다. 무엇보다 박문대는 제 두뇌가 어떤 낯익은 상대를 전 애인 같은 것으로 꿈에 등장시키는 파렴치한 짓을 했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이 전부는 그렇잖아도 예민한 성격을 끊임없이 조금씩 몰아붙이고 있다. 좀처럼 현실감과 유리될 생각을 하지 않는 꿈, 학문적인 실무는 해 본 적이 없어 그런지 터무니없는 속도의 성과를 요구하기 급급한 윗놈들, 그리고 그들과는 상반되게 상당히 길고 꾸준한 연구를 요하는 새로운 언어의 분석. 모두가 맞물려 박문대를 무심코 초조하게 만드는 셈이었다. 이세진이 애매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으나 침묵으로 일관한 박문대는 카드를 찍고 살균실로 들어섰다. 소독을 마치고 몇 가지 장비를 착용한 뒤 반대편 통로로 나서면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이 눈짓과 함께 호위하듯 곁에 붙어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처음 임시 센터에 들어오게 됐을 땐 전부 긴장으로 경직한 채 총신만 쥐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말이다.
- 낯선 언어를 분석하려면 어떤 최소조건이 필요합니까?
단일어 사용 분석인지 두 언어를 병용할 수 있는 분석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그건.
- 단일어로 전제하죠. 서로는 서로의 언어를 모른다고.
음성 언어인지 문자인지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이미 기존에 유사한 언어가 있는 경우지만.
만약 전혀 비슷하지 않은 언어라면? 지구상의 무엇과도.
실례지만 자꾸 조건을 덧붙이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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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나갔나. 몇 달 전의 밤, 연구실도 아닌 자택으로 급하게 찾아온 이가 번듯한 국가 소속 군 장교가 아니었다면 그런 말이나 쏘아붙여줬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그가 다짜고짜 들이밀었던 신분 증명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가 가고 난 이후 상황이 허무맹랑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마침내 강의를 하러 가던 중 뉴스의 긴급 보도 자료를 보고 나서야 지금이 만우절과는 거리가 먼 계절임을 다시금 상기했었다. 혼자 산 지도 십여 년이 넘어 익숙하게 적요하던 방 안에서 맛도 없는 레토르트 볶음밥을 깨작거리며 중령이 들려 주었던 녹음 파일의 자잘한 소리들을 새벽이 모두 흘러가도록 곱씹었다. 그건 옷깃이 스치는 소리 같기도 했고,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순한 37초짜리 녹음 파일 하나로 생판 모르는 언어를 분석해 낼 수 있는 학자는 없을 테니까. 하다 못해 알지도 못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상대가 상대가 친절히도 음성 발화를 써 주고 있었으리라 예단해 현장의 소리만을 녹음해 온 부분만 보아도, 지금 그 외계인인지 뭔지를 상대하는 현장의 사람들이 이런 부류의 분석에는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첫 감상은 지극히 건조했다. 외계인치곤 참 사람 같은 소리를 내는군.
다음으로는 채점할 레포트들을 늘어놓은 채로 커피나 타며 생각했다. 외계인. 外界人. 공상 과학 소설 따위에서 지구 이외의 천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지적인 생명체. 그래, 공상 과학 소설 따위다. 그런 책들, 혹은 텔레비전에서 특선 상영이다 뭐다 해서 틀어 주는 때 지난 SF 영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단어라 비현실적이라는 거부감이 먼저 들긴 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만큼은 명확했다. 지구가 아닌 곳에서 왔다는 것이겠지. 외계인이라는 우습고 유치한 단어를 지구 밖의 생명체라고 치환해 생각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어쩐지 허무맹랑한 존재보다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먼저 들린다. 특히나 NASA 같은 곳에서 요할 법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박문대에게도 정부의 요청이 들어왔다는 건 상황이 그만큼 이례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겠는가. 허구한 날 과학 잡지나 신년 기사에서 떠들어 대는 ‘화성에서 생명체가 살고 있을 가능성 발견’ 같은 미적지근한 문구 한 줄이 아니라, 인류가 언어를 매개로 지적인 소통 방식을 고민해 볼 가치가 있을 만큼 일정한 수준과 생명력을 갖춘 존재가 상대라는 의미였다.
돌겠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 여기엔 언어학자로서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분명히 존재한다. 본인의 분야에 적성과 흥미 둘 중 하나라도 맞아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학자라면 이런 기회 따위를 내던지는 멍청이는 없다.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을 처음으로 손대 볼 기회 말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둘. 내일 기어코 그 중령에게 전화를 걸게 되겠다. 박문대는 그날 새벽 두 가지를 명확하게 깨닫곤 묵묵히 짐이나 챙기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외계인에 사람 인이라는 한자가 당연히 들어가는 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파일 줘, 이세진.”
“여기. 오늘은 아마…… 지난번에 확인해 둔 문자소들 교차점검할 거고, 조건서술문 층위 파악하는 것까지.”
“음성언어는 안 쓰는 외계인이라 참 다행스럽게 됐다.”
“에이, 불평은. 그래 놓고 맨날 잘만 하면서.”
그것, 그러니까. 청려가 자리하고 있는 방 안은 언제나 블리치 바이패스를 꾸역꾸역 적용한 필름처럼 색채가 조금 바래 있는 느낌이었다. 박문대가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청려의 시선은 박문대에게로 먼저 꽂힌다. 때때로 언어를 교환하는 순간이 아닌 이상 그게 이세진에게로 향하는 법은 없다. 청려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기고 있었다. 박문대는 그게 ‘웃음’이라는 행위라는 걸 그가 이해하고 있는지 종종 궁금해하곤 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처럼 하나의 행위가 언제나 그 자체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웃음이라는 표정이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특정한 의도와 함께하는 것처럼.
청려가 그걸 이해하고 고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인지, 단순히 모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웃음이라는 행위에 대응될 만한 단어가 그의 언어에도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어쩌면 존재한들 의미는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 언어의 방식이 사고를 낳는다면 그의 세상에서 표정이라는 것들은 대단히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인 무언가일 수도 있다.
박문대는 둘 사이를 가로막은 유리벽으로 가까이 다가가 기계들을 세팅한 뒤 그에게도 보일 크기의 화면을 켰다. 문자를 통해 소통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언어의 체계를 훨씬 더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지금은 처음보다 훨씬 수월해진 셈이었다. 상부에서 원하는 것은 외계인과 구체적인 문답이 가능한 수준의 언어 교환이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축적해야만 하는 사전적 정보들이 수두룩했다. 알파벳을 모르면 인사말도 적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니까. 새로운 언어의 파편을 모으는 과정은 언제나 더디기 마련이다. 특히나 청려가 지구의 문자 체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혹은 사용해 줄 생각이 없거나) 굴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의 방향을 팀이 청려의 언어를 습득하는 쪽으로 잡게 된 이후엔 더더욱. 박문대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체계를 배우면 배울수록 ‘외계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지독하게 낯설고 기존의 사고를 탈피해야만 납득할 수 있는 무언가. 끊임없이 학자로서 축적해 온 지식들을 의심받거나 시험당하는 듯한 감각.
오기도 함께 자극된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 XX년 11월 16일. 참여자 박문대, 이세진. 대상자 청려. 14회차 조사 시작하겠습니다.”
레코드를 켠 박문대가 기계적으로 중얼거리며 이세진에게 준비 되었냐는 듯 가볍게 눈짓했다. 사실 시설 내의 많은 과학자들은 청려의 신체가 인간과 지극히 동일한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고 뇌의 활동 역시 비슷하다는 사실에 큰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그가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 가지고 있던 것들의 초월적인 기술력이나 신원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낼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외계인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외계의 정의를 죄다 뜯어고쳐야 할 거라고 일견 과격한 주장을 하는 팀원도 있었지만 박문대는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았다.
적어도 박문대에게 있어 그는 명료히 외계(外界)적인 존재였다. 얼마나 인간과 유사하건 이런 언어를 쓰는 존재를 그럼 달리 뭐라고 표현할 것인가?
가끔 회귀는 특권이 아니라 병이라는 생각을 해요. 해리성 둔주 같은 거죠. 처음 되돌아갔을 때 느낌이 꼭 그랬어요. 세상에서 뭔가를 ‘나만’ 알고 있는 감각이 마냥 달콤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껏 그걸로 실컷 덕 봤으면서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해 봐야 설득력 없다. 내 시큰둥한 답을 듣고서도 너는 작게 웃으며 가만히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댈 뿐이었다. 어차피 네 피로감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볼 수만 있지, 겪을 수는 없는 사람이니까. 네가 회귀하며 거쳐 온 과정은 알지만 내게 그건 영화를 보는 듯한 유리된 느낌에 더 가까웠다. 다만 뒤에서 전해지는 체온만큼은 언제나 생생했다.
후배님은 유일하게 날 연속적으로 봐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예요. 비유하자면 이런 거죠. 모두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있는 트랙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올 때, 후배님은 내가 이미 몇 바퀴를 돌았는지 알고 있는 하나뿐인 사람이라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너는 현재의 위치에까지 도달하기 위해 이미 수십 번의 회귀를 거듭한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여기까지 와 보는 건 나를 만난 이번의 회차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나는 이제껏 너를 볼 때마다 느껴지던 기이한 축적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네 회귀를 ‘이미 사라진 회차’로 인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네 과거’로 인지하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 사실이 매력적이거나 특권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묘할 뿐이다. 이따금 완벽한 신재현의 눈을 들여다 볼 때마다 비춰지는, 수십 번을 실패한 신재현이.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에 후배님만큼의 가치가 더해지는 거예요. 이해 가나요? 그 시간들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걸 상기시키죠. 딱…… 이만큼의 의미를 더 부여하면서.
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한 뼘 정도를 만들어 내 눈앞에 가볍게 흔들었다. 이해는 가는데 그렇게 감상적으로 표현할 것까지야. 나는 다시 집중하라는 듯 네가 앉은 테이블을 살짝 두드렸다.
그래서 네 말은, 결국 그 미래를 막으려면 새로운 도구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맞아요. 다른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패하는지는 후배님도 봤잖아요. 정확히는 내 이전 회차들을 인지한 거겠지만.
그게 그거지. 그리고 너는…… 그 새로운 도구가 언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고. 언어를 어떻게 써먹겠다는 거야? 전 지구인들이 똑같은 단일어만 쓰는 세상을 꿈꾸고 있기라도 하냐?
아뇨, 후배님.
짧게 덧붙인 너는 꽤 단조로우면서도 화려하게 웃는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너는 펜을 들어 종이 위에 몇 가지 단어들을 적어내렸고 나는 그것을 눈으로 훑었다.
종종 너무 많은 언어들이 쓰다 보면 형해화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악의 미래를 막으려면 모두의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하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봐. 어떤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거야.
시작과 끝이 동일하게 인식되는 형태로.
너는 꽤 뚜렷한 동그라미 하나를 종이에 그렸다. 그리고는 내게 원의 시작점이나 끝점을 짚어 보라고 말한다. 물론 네가 펜으로 그걸 처음 그리기 시작한 위치는 짚을 수 있겠지만, 나는 네가 그런 피상적인 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에요. 시간에 대한 개념이 흐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무엇이 원인이 되고 무엇이 결과가 되는지를 가를 필요가 없고, 과거랑 미래가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재를 만들고, 마침내 내가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 모두를 ‘현재’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현재를 살면서 미래도 알 수 있게 된다면.
너는 다시금 종이 위에 선 하나를 쭉 긋는다. 그 위에 점 하나를 찍었다.
이 점을 현재라고 할게요. 그럼 우리는 이 점이 찍혀 있는 순간과 그 이전까지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요. 시간을 상당히 단선적으로 이해하면서요. 그런데 그 파악의 범위를 이 선 전체로 늘려 보자는 의미예요.
……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총체적인 형태로 파악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원한다는 거야?
그게 필요해요. 적어도 삼십 년 내에는 그게 가능해야 해요. 그리고 난 그게 언어를 배우면서 가능할 거라고 믿고요. 전에 없던 새로운 언어.
언어가 사고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수와 색채에 대한 어휘가 존재하지 않는 언어인 피라항어를 사용하는 원주민들은 색과 수의 개념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들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외부인’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다르다. 퀸즈랜드의 포름푸로 부족은 자신을 중심으로 삼지 않는 절대적인 방위성을 갖는 언어를 사용하고, 이것은 그들이 공간과 시간을 인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누에보 산의 마티스 부족은 발화가 전달되는 순간의 현재성을 엄밀하게 중시하는 표현들을 활용한다. 1940년 벤자민 리 워프는 언어 속 성별과 시공간의 개념이 어떻게 그 언어를 구사하는 이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단히 급진적인 생각을 내놓았고 이는 사피어-워프 이론이라는 이름을 입어 언어학계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너는 언어를 동일한 방식으로 활용하자고 말하고 있다. 상호간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가 아닌, 그 언어를 선천적으로 배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 그 자체를 뒤바꿔 놓을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하자고. 너는 발화자들이 ‘시간’이라는 대상과 체계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는 언어를 원하는 셈이다. 현재를 인식함으로써 동시에 미래도 파악할 수 있는 언어. 그것이 결말을 바꿀 수 있는 도구가 될 거라고 믿는다. 네가 이전 회차에서 겪었던 모든 참혹한 패배들을 정복할 수 있는.
시간을 하나의 흐름이 있는 대상이 아닌 시작과 끝이 없는 순환적 구조로 인지한다는 건 불교의 개념마저 함께 떠오르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모든 것은 과거인 동시에 미래이고 현재라는 감미로운 신학. 골똘한 표정으로 네가 그려 놓은 선들을 응시하고 있자니 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라플라스가 했던 말도 있잖아요. 우리는 현재 상태의 우주를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어떤 순간에 자연을 움직이는 모든 힘들을 알고 있고 자연이 구성된 모든 물체들의 모든 위치를 알고 있는 지능은, 만일 이 지능이 이 자료들을 분석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하다면, 단 하나의 공식에 우주의 가장 큰 물체의 운동과 가장 극미한 원자의 운동들을 담을 것이다. 그러한 지능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불확실하지 않을 것이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그것의 눈앞에 보일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했던 이야기도 비슷하죠. 그는 예언자가 되어 거울에서처럼 현재에서 미래를 볼 것이다…….
너 그 두 사람 다 수학자에 과학자였다는 건 알지?
중요한 건, 사고방식을 바꾸자는 거예요.
언어로?
네. 상상해 봐요. 시간을 그런 방식으로 인식하는 언어는 어떤 형태의 문자를 써야 할 것 같아요?
너는 나긋하게 물으며 손끝으로 네가 그려 놓은 동그라미를 톡톡 건드렸다. 원형. 그래. 비선형적인 문자여야 하겠지,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원처럼.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언어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 너는 이런 생각을 어떻게 얻게 됐을까. 무수하게 겹쳐진 회귀의 지층과 과거로 되돌아가길 반복하는 단독자의 속성이 세상을 그렇게 보게 만드나? 나는 짧게 고민하다 네게 한 마디를 더했다.
회귀하면 원래 다 그렇게 되냐?
박문대는 일순 눈을 떴다. 마치 의식을 누가 강제로 맞붙이는 것처럼 잠에서 깨어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왜 매일 꿈 속에서 그와 청려가 함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둘은 때때로 고정된 방 안의 일부처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시답잖은 영화를 보고 있기도 했고, 복잡한 조형판을 앞에 늘어놓은 채 학술적인 의견을 교환하고 있기도 했고, 이따금 함께 침대에서 눈을 떴다. 개중 무엇도 박문대 자신이 저 너머의 외계인 한 놈과 할 법한 행동과는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나직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가 천천히 눈가를 문지르자 걸쳐져 있던 담요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팀원들이 덮어 주기라도 했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미지근한 물을 들이키자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흐르는 감각이 그나마 정신을 일깨운다. 아직 분석할 것들이 남아 있었고 시간은 많지 않았다. 박문대는 다시금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무수한 원형의 문자들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문자 체계.
청려의 언어를 정의하자면 아마 그럴 것이다. 이 기묘한 비선형적 원형 문자들은 문장의 시작과 끝을 분간할 수 없다. 어순은 무의미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언어를 쓰고자 하는 화자는 문장을 시작하는 찰나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끝맺을 구조마저 하나의 덩어리처럼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 사실을 처음 파악해낸 순간 어렴풋이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게 가능한가? 자연적으로 이런 언어가 존재할 수 있나? 이것이 자연적으로 발생될 수 있는 구조의 언어라면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생물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며 살아가는 걸까?
당장 지금만 해도 이제껏 습득한 언어를 바탕으로 유아적인 수준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계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휘들을 빠르게 매치하고 조합해 하나의 완성된 원형 구조로 동시에 표현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박문대는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건드렸다.
다시금 머릿속에 기묘한 꿈의 잔상이 남았다. 차츰 이것이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건 어째서일까. 왜 단순한 대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까. 근 몇십 년을 스스로가 지극히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박문대로서는 자신의 이런 상태가 더없이 불편했다.
결국 책상 앞을 벗어나, 조사가 허락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복도를 지나는 건 그 탓이었다. 허가되지 않은 시간에 이 구역에 발을 디뎌 놓고 있는 건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총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짓이지만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중령님께 방금 말씀드리고 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추가적인 형태소 자료가 필요해서요. 적당히 학술적인 단어와 어려워 보이는 서류 몇 장을 군인들의 눈앞에 흔들어 대며 태연하게 카드 키를 찍었다. 홀로 방 안에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이곳도 카메라로 찍히고 있을 테니까.
청려는 여전히 그곳의 유리벽 너머에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박문대의 기척을 눈치채는 것도 금세였다. 표정은 바로 그 순간 변한다.
화사한 인상. 어쩐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얼굴. 네가 누구지?
청려가 가까이 다가와 섰지만 박문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어차피 유리벽에 가로막혀 자신에게 닿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청려는 그 순간 조용히 달싹이던 입술을 벌린다. 손을 들어 마치 소리치려는 것처럼 입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박문대는 잠시간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멈칫했다.
마침내 흘러나오는 건 낮은 후성에 더 가까웠다.
“후배님.”
침몰하는 것 같은 나직한 목소리가 박문대의 언어를 입에 담고 있었다. 박문대는 그 순간 깨닫는다. 손은 외치려던 게 아니라, 천장과 측면의 카메라들로부터 그가 입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기 위함이었다는 걸.
과하지 않지만 충분히 또렷하게 웃고 있는 청려와 그렇게 눈을 마주친 몇 초, 불현듯 박문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자가 있었다.
신재현.
왜요, 후배님?
나는 눈앞의 간단한 문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아적인 수준의 의미만을 담고 있는 문장이었지만 너와 나, 그리고 이 연구소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문자로 적혀 있었다. 그게 무심코 경이로웠다. 무의미한 글자들과 형태소의 나열들이.
그런데 너도 알고 있잖아. 영어랑 한국어만 해도 여러모로 다르긴 하다만…… 평생 한국어를 써 왔던 사람이 제 2 외국어로 영어를 배운다고 사고방식이 갑자기 그 나라 원어민처럼 달라지진 않아.
그럼요.
이 체계를 만드는 데만 십 년이었잖아. 이제부터 태어나는 아이들한테 이걸 가르친다고 해도 너무 늦었고. 이게 실질적으로 적시에 활용되는 게 가능할지 누가 장담해.
너는 눈치가 빠르네요, 하고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던진다. 제안이 획기적이었고 끝내 해낸 것이 대단하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나와 너처럼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미 자라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습득한다고 사고의 체계가 통째로 바뀌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당장 나 자신만 해도 이걸 완전히 익히진 못한 채 불완전하게 세상을 보고 있으니까. 새로운 사람들에게 생득적으로 가르치기엔 그들이 충분히 자라길 기다려 줄 시간 또한 부족했다.
그러나 방 안에 이걸 조급해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인 것처럼 보였다. 너는 그 무엇도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것처럼 가만히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순간 깨닫는다.
알고 있잖아요, 후배님. 이걸 ‘지금의 사람들’에게 가르치기엔 시간이 부족하지만, ‘과거의 사람들’에게 가르치기엔 충분하죠. 난 그걸 전해 줄 수 있고요.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어?
전부를 거슬러 되돌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한 주를 거슬러도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사람의 의식일 텐데, 십여 년을 회귀한다면 그 피로감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입술 틈으로 숨이 새어나온다. 꼭 누가 잘못 구멍을 낸 인형처럼.
후배님.
신재현.
후배님도 이젠 미래를 알지만 기꺼이 그걸 향해서 가는 기분을 모르지 않잖아요. 우리는 아무것도 억지로 떠밀려서 선택하지 않았어요.
만약 그 다음까지 가게 되면.
거기에도 날 읽어 줄 후배님이 있을 테니까요. 처음부터 이 언어를 배울 기회가 있었던 박문대는 앞으로 내가 갖게 될 미래까지 수월하게 읽겠네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너도 나도 알고 있는 것은, 회귀라는 선택지가 곧 이전 생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점. 우리 모두 암묵적인 합의를 지속했던 것은, 미래를 알면서도 다시금 그 전부를 반복하고자 하는 과정의 유의미함. 너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앞에 거울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표정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무언가가 꼴사나울 만큼 형편없이 떨리는 것 같았다. 한 발 늦게 그게 내 심장 소리라는 걸 알았다.
다시 한 번 공기가 새어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끝내 입술을 감쳐물었다. 우리 전부의 수긍은,
많은 이야기들은 끝과 함께 시작하고, 어떤 이야기들은 시작과 함께 끝을 맺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길항하지 않지만 동일시될 수 있는 것들임을 납득하기 때문이다. 전체를 파악함으로써 시작과 끝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의 감각을 겪어 봤기 때문이다. 미래를 통찰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발화에는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나는 이미 네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