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셉션
W.비타(@VITAEOR_)
[매번 견종을 바꿔 기르더니 이번에는 안기르네 지난번에 조현병 루머로 망해서 그런가]
톡, 톡, 톡. 제 얼굴을 붓질하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던 신재현의 핸드폰, 잠금화면에 문자 알림이 떠올랐다. 떠오른 문장은 파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견종`. 단어를 보자마자 빠르게 전원 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꺼 버린 신재현의 모습을 보고, 그의 눈가를 칠하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 ........ "
" 재현아, 문자 온 거 아냐?"
" 네, 잠깐 확인하고 와도 괜찮을까요?"
" 그럼. 메이크업은 채율이부터 먼저 해줄게."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고개를 끄덕인 신재현은 일정한 발걸음으로 대기실 문밖을 빠져나왔다. 조명은 지금까지도 번쩍였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관계자들의 짧은 인사에 VITC의 청려답게 웃으며 화답한 그는, 사람이 없는 방송국 구석의 비상계단에 다다르고 나서야 표정을 굳혔다. 신재현은 곧바로 문자가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뒤따랐다.
- 너 뭐야.
신재현의 말소리를 들은 통화 건너편의 남자가 픽 웃었다. 그때랑 똑같네. 일견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 그의 태도에 신재현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남자의 미성이 곧바로 이어졌다. 왠지 모르게 남자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이 장면도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치밀어오르는 기시감을 이상하게 느낀 신재현이 미세하게 표정을 찌푸렸다.
- 너 같은 사람.
아. 신재현은 짧게 침묵했다. 이 이유 모를 친숙함은 그가 나와 같은 '회귀자'이기 때문인가? 바쁘게 머리를 굴리던 신재현이 내놓은 답은 당연하게도 한 가지였다. 제 발로 찾아온 인간이니, 마땅히 가치를 감정해야 하지 않겠던가. 필요 없는 것이라면 버리고, 쓸모없는 것이라면 취한다. 그것이 신재현의 신조였다.
-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 후, 레티 엔터 로비로 오세요. 직원이 회의실로 데려다 줄 테니까.
신재현의 말을 들은 남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신재현은 그에 개의치 않고 다시 표정을 꾸며낸 채 대기실로 들어갔다. 지금은 VITC의 청려로 살아야 할 때였다.
" 재시작 중이라면서. 이름이 뭐예요?“
" 박문대입니다. "
" 몇 번째."
" 세 번째요."
" 얼마 못 갔겠네요."
자신을 박문대라고 소개한 남자는 묻는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신재현은 그의 손짓, 어조, 말투에서 익숙한 것을 대하는 듯한 태도를 읽어냈다. 그는 박문대의 이 모든 것이 단순한 회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신재현이 가진 의문은 박문대를 통제할 수 없는 변수라고 판단하게끔 했다. 속내를 깔끔히 묻어둔 그는 온화하게 대꾸하며, 팔을 풀어 탁자로 올렸다.
" ······ 나랑 꽤 친했나요?"
" 그렇게 느끼신 듯합니다. 제게 여러 가지를 많이 보여주셨거든요."
" 아, 그러면 문대 씨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 인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저도 선배님을 꽤 좋아했습니다. 아니······ 아주 많이요."
문장 사이사이 텀이 길었으나, 오래 친애를 쌓은 사람에게 말하듯 애정 어린 말투였다. 박문대는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신재현이 으레 하던 미소와 비슷한 그의 모습에, 원인 모르게 속이 약간 뒤틀리는 것을 느낀 신재현은 박문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박문대는 이번에도 막힘 없이 대답했다. 마치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 데뷔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어떻게 데뷔하게?"
" LeTi는 남자 솔로 지원을 안 하니, 한 달 안에 쓸만한 연습생들을 찾아 데려오겠습니다. 그 시간 동안, 선배님께서 절 가르쳐 주셨으면 하는데요."
" 내가 왜 내 시간을 내어 문대 씨를 가르쳐야 하죠?"
" 이제 곧 휴식기시잖습니까. 저를 가르쳐 주신다면, 앞으로 3년간의 미래 정보와 피해야 할 인물을 속속들이 알려드리죠. 선금으로는 VITC에서 앞으로 거하게 사고를 칠 멤버가 누구인지, 정도면 될까요?"
VITC을 꺼내자마자 신재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박문대는 한 치의 동요 없이 신재현을 응시했다. 침묵이 길어졌다. 탁자로 올렸던 팔을 거둬들이고, 깊게 생각에 잠겼던 신재현은 박문대의 요청을 수락했다.
" 좋아요, 후배님."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 따라와요. 가르치기로 한 이상 기본 실력은 파악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 멤버는 누구인가요?"
신재현을 뒤따라 회의실 의자에서 느릿하게 일어난 박문대가 읊었다.
" VITC의 메인보컬입니다.“
신재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미리 치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신재현은 놀랐다. 그날, 녹음실로 데려가 확인했던 박문대의 보컬 실력은 프로급이었다. 여성 보컬이나 편하게 할 법한 3옥타브 솔까지 올라가는 고음이라. 그는 시간을 들여, 박문대의 능력치를 낱낱이 파악했다. 팬들을 끌어모을 만한 귀염상인 마스크에, 춤은 메인댄서 포지션에 밀어 넣기에는 좀 부족하지만, 노래 실력이 단점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뛰어난 편. 기획력, 아이디어, 끈기, 그 밖의 능력치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울 정도. 신재현이 판단하기에, 박문대 정도라면 웬만한 1군 남자 아이돌의 메인 보컬도 꿰찰 수 있었다. 그를 가르치는 것은 꽤 즐거웠다. 메인보컬을 아무런 법적 문제 없이 쫓아낼 준비를 하면서 가장 많은 도움을 준 것도 박문대였다. 신재현은 박문대가 탐났다. 별 문제없으면 LeTi에 계속 눌러 앉혀 놓고 싶은 정도였다. 박문대는 쓰레기가 가득한 진흙탕 속에서 발견한 보석이었다.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신재현은 회귀 전의 자신이 박문대와 정말로 친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박문대는 신재현의 취향과 성향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박문대는 무의식적으로 신재현을 배려하고 챙겼다. 동시에 그는 신재현이 자신에게 친숙하게 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행동했다. 신재현이 제 생각보다 ‘친밀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때는, 박문대는 무언가를 다시 깨달은 것처럼 멈칫했다가, 다시 말하고는 했다. ······선배님, 이제는 회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더 이상은요.
그는 연습실에서, 녹음실에서, 회의실에서 신재현에게 자주 이 말을 했다.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진심으로? 신재현은 잘못된 것이 있다면 처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리셋했다. 리셋하고, 또 리셋했다. 처음으로 돌아갔다. 박문대는 신재현의 리셋을 부정하고, 이 시간 선에 자신을 묶어놓고 싶어 했다. 의아했다. 박문대 또한 같은 회귀자면서, 리셋을 입에 담지 않는 이유가 뭘까. 박문대의 ‘애정’과 더불어, 그가 행하는 이 모든 행동은 신재현에게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박문대`가 약속했던 한 달을 하루 남겨놓은 시점, 그는 신재현에게 특별한 요구를 건넸다.
" 선배님."
" 네, 후배님."
" 내일 집에 초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숙소 말고, 개인 사택이요."
" 하하······ 그건 후배님께서 VITC의 메인 보컬이 되겠다는 암묵적인 허락인가요?"
박문대는 얼굴을 팍 찌푸렸다. 짧게 웃음을 터트린 신재현은 박문대의 요구를 기꺼이 수용했다.
" 좋아요. 뭐 때문인지 알려줄 수 있어요?"
" 자세한 내용은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안 돼요."
박문대가 말을 마치자마자, 회의실 밖을 지나가던 직원 한 명이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박문대를 노려보다가 사라졌다. 신재현은 기민하게 직원의 행동을 포착했다.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닐진대, 어째서? 박문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남기고 나갔다. 신재현은 회의실 문을 나가는 박문대를 끝까지 바라봤다.
내일, 무언가 일어난다.
긴 시간 동안 정상에 군림했던 신재현의 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재현의 집에서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박문대는 신재현을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집으로 걸었다. 그는 일부러 주위를 몇 번 둘러보며 초행길인 척 티를 냈다. 눈치 빠른 새끼. 신재현에게 진상을 들키고, 투사체에게 죽을 뻔한 몇 번의 고비를 넘겨 인셉션의 성공 앞까지 왔다. 박문대는 자신의 보폭을 맞춰 걸어주는 신재현을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박문대가 제 애인에게 인셉션을 시도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권희승 이후의 숙주를 찾지 못한 시스템은 오작동을 일으켰다. 실제의 박문대조차 시스템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기이하고 까다로운 고장이었다. 기생할 곳을 잃어버린 시스템은 아직 상태이상이 ‘비활성화’ 된 사람을 찾아다녔고, 하필이면 시스템의 이러한 추적에 신재현이 걸렸다. 그의 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탓이었다. 시스템은 박문대와 콩이를 품에 안고 잠든 신재현의 꿈에 들어가 ‘지금의 커리어는 완전무결하지 않으니 다시 리셋해야 한다’는 생각을 심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꼴이었다. X발. 품이 허전해서 깼더니, 아파트 난간을 넘어 떨어지려고 하던 애인을 보는 개 같은 경험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박문대에게 아주 끔찍한 기억이었다.
신재현에게 이상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박문대는 신재현을 아주 길고도 긴 시간 동안 설득해 난간에서 떨어뜨렸다. 그는 신재현을 기절시켜 다시 침대에 눕힌 다음 실제의 박문대에게서 해결법을 뜯어냈다. 큰달이 말해준 방법은 간단했다.
" 형. 시스템이······ 그분에게 인셉션을 했으니까, 형도 하면 돼요. 형의 애인분께 형이 예전에 말해준 것처럼, 흠이 생겼다고 지금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 생각을 심으세요. 꿈을 설계하는 건 제가 해드릴게요. 할 수 있어요! "
박문대는 침음을 삼켰다.
" 한 번도 안 해봤는데."
큰달은 끈질기게 박문대를 설득했다.
" 건우 형은 잠재력 무한이잖아요. 그건 형이 인셉션을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도해보는 건 어때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고민에 잠긴 박문대의 얼굴을 콩이가 걱정스럽게 낑낑거리며 핥았다. 새까만 콩알 같은 두 눈으로 시선을 돌려 한참 동안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면서 침묵하던 박문대는, 인셉션을 결심했다. 백일몽 이후부터 계속해서 자각몽을 꾸며 추출과 인셉션에 대한 개념을 익힌 얕은 경험밖에 없었지만, 정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방도를 찾기 전에 저 놈이 죽을 것 같았다. 신재현을 구해야 했다. X 같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백일몽 이후 루시드 드림을 꿔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 짓도 못 했을 테니까. 가슴팍이 꿰뚫리는 대신 신재현을 구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남는 장사였다. 지금 즉시, 가장 즉각적인 조처를 할 수 있는 건 박문대, 그 혼자밖에 없었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큰달은 박문대에게 인셉션과 추출에 대한 지식을 더 깊고,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박문대는 큰달에게 신재현의 꿈 속을 자신의 백일몽과 같게 설계해달라고 부탁했다. 백일몽은 그를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각몽에 빠트린 주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시스템은 인셉션을 준비하기 위해 신재현의 곁에 누운 박문대에게 기쁘게 달라붙었다.
[상태이상 : 구출이 아니면 죽음을!]
정해진 기간 안에 인셉션을 성공하지 않으면, 신재현의 사망.
남은 기간 : D-1
X발······
깜박이는 상태창을 끝으로 시야가 점멸했다. 박문대는 백일몽을 기반으로 설계한 큰달의 루시드 드림 속에 들어와 신재현에게 접근했고,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오도록 유도했다. 꿈과 현실의 시간이 달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신재현이고 박문대고 지금 전부 뉴스 사회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올렸을 테니까. 박문대가 생각하기에, 인셉션을 위해 가야만 하는 최종 장소는 신재현의 사택이었다. 보안이 삼엄함과 동시에 자신과 콩이와의 추억이 그대로 묻어난 그 곳에, 놓여 있던 담배를 불태우는 것. 그것으로써, 박문대는 인셉션을 성공할 것이다. 그는 신재현이 담배를 피우며 전광판을 보던 그 겨울 밤의 기억을 더 이상 슬프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신재현의 집 문 앞이었다. 도어락이 돌아가고, 익숙했던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들어와도 좋아요, 후배님."
" 감사합니다, 선배님."
박문대는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어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성큼성큼 걸으며 주변을 확인하던 박문대의 눈에 빠끔히 열린 방의 침대에 놓인 담배 케이스가 보였다. 문 근처로 다가가 방 안을 가리기 위해 몸을 휙 돌린 박문대는 신재현에게 말 한마디를 빠르게 남겼다. 언제나 해주고 싶던 말이었다.
" 언제나 말했지만, VITC이 이뤄놓은 커리어는 대단합니다. 이쪽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배님을 인정할 거예요."
"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문대 씨?"
" 흠이 생겼다고 지금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소리다, 신재현. 편하게 살아. 콩이도 있고, 나도 있잖아. 넌 잘해왔어. 이룬 것도 많고. 앞으로도 잘할 거야."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그는 갖고 왔던 라이터로 담배를 불살랐다.
[문대 형, 이제 그분의 꿈에 있는 투사체들이 형을 죽이려고 달려들 거예요. 그 분이랑 킥을 하셔야 해요. 가장 밑바닥의 림보로 떨어지기 전에요!]
큰달이 보낸 꿈속의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자신의 토템인 신재현과의 커플링을 만지작거리며 이곳이 아직 꿈임을 확인한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신재현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었다면, 지금부터는 정말 위험했다. 박문대는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신재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박문대를 바라봤다. 설명을 해주려는 찰나,
현관문이 열렸다.
‘투사체’가 들어왔다.
‘투사체’의 손에는 날붙이가 들려 있었다.
박문대가 상황을 알아채기도 전에, ‘투사체’는 박문대에게로 다가와 그의 배를 찔렀다.
가슴팍이 꿰뚫렸을 때보다는 못한 고통이었다. 그래도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 윽······ " 아랫배를 부여잡고 천천히 허물어지는 박문대를 신재현이 받아냈다. 밭은 숨을 내뱉는 박문대를 향해 ‘투사체’가 다시 칼을 치들었다. 막을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신재현은 발로 ‘투사체’를 가격했다. ‘투사체’는 신재현에 의해 쓰러지고, 칼을 빼앗기고, 머리를 다시 가격당해 기절하는 그 순간까지 박문대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그를 죽이려고 발버둥 쳤다.
상황이 끝나고, 신재현은 현관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는 천천히 박문대에게로 다가갔다.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으며 숨을 몰아쉬는 그를 내려다보며, 신재현은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 문대 씨, 상황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데요."
" 말하면 믿어줄 것도 아니잖아, 너."
" 글쎄요. 문대 씨니까······ 믿어줄 수도 있지."
기침을 터트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린 박문대는 부축해달라는 뜻으로 신재현에게 손을 뻗었다. 신재현은 박문대의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예 그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 아니, 난 부축해달라는 뜻이었는데. " 박문대는 짐짓 당황한 채 가만히 읊조렸다. 신재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신재현의 품에 안긴 박문대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현관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굉음이 집 안을 울렸다. 여러 개의 손과 발이 현관문을 무차별적으로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박문대는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 젠장."
" 왜요?"
"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난 네 애인이고, 우리 둘 사이에는 콩이라는 강아지도 있어."
" ······콩이를, 내가 데려왔나요?"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움직이니 상처가 벌어졌다. 그는 배를 부여잡으며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을 집요하게 살펴보던 신재현이 움찔하며 박문대를 고쳐 안았다.
" 그러니까, 지금 내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건 아는데."
" 네, 문대 씨. 말해요."
" 이 아파트에서 떨어져야 해. 우리 둘 다."
" 투신자살?"
" 자살이라기보다는, 킥(Kick) 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맞겠지."
신재현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지금의 나한테는 같이 자살하자는 말로밖에 안 보이는데. 내가 문대 씨 말을 믿어야 할 이유는?"
박문대는 신재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고, 고통과 흥분으로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나마 깨끗한 상의에 피를 닦아낸 박문대가 신재현의 멱살을 붙잡고 끌어내려 입을 맞췄다. 신재현의 눈이 약간 커졌다. 박문대는 눈을 감았다.
신재현은 키스를 받아들였다.
문을 쾅쾅 가격하는 소리가 더 거세졌을 즈음 숨이 찬 박문대가 입을 먼저 뗐다. 신재현은 눈을 다시 떴다. 그리고 품 안에 있는, 자신의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한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비이성적이고, 평소의 신재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결정을 하기로 했다. 박문대가 만든 변화였다. 신재현은 박문대를 안아 든 채로 걸어가 베란다 문을 열었다. 그는 난간 앞에 섰다. 교정을 위해서가 아닌, 아주 개인적이고 지극히 비정상적인 충동으로 인해.
"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박문대가 씩 웃었다.
" 네가 원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 신재현. 너나 나나 한 명 없으면 죽고 못 사는 건 마찬가지니까. "
두 명의 인영이 아파트 난간을 훌쩍 넘어 바닥으로 낙하했다. 박문대는 생각했다. 낙하 이후에는 비상이 뒤따르듯, 지금 이 곳에서 떨어지는 우리에게 앞으로 큰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까.
시야가 다시금 새하얗게 점멸했다.
박문대는 눈을 깜박였다. 꿈속에서 칼에 찔린 여파인지 몸이 아팠다. 약하게 기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박문대를, 옆자리에 누워 있던 신재현이 꼭 안아 가둔 채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몸을 비트는 것을 멈춘 박문대는 신재현의 품 안에서 창밖을 바라봤다. 새파란 새벽이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 고마워요."
신재현이 가만히 읊조렸다. 그의 두 눈에는 리셋을 향한 갈망 대신 박문대를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를 확인한 박문대는 한숨을 푹 쉬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피곤했다.
" 알면 됐어. ······좀 쉬자."
" 잘 자요, 문대 씨."
이마에 짧은 입맞춤이 내려오는 것을 느낀 박문대는 눈을 감았다.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눈가를 찌르는 햇빛에 박문대는 안도했다. 신재현과 나는 다행스럽게도 함께 내일을 맞이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럴 것이었다. 늙어 죽기 전까지는, 계속, 행복하게.
시스템이 꽤 괜찮은 보상을 준비했길 바라며, 그는 잠의 수렁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