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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청려] unbelievable

 

데이터 팔이 류건우×아이돌 청려

W. 해랑(@0621X0909)

심심풀이, 그리고 돈벌이를 위해 방송국에 찾아온 건우는 돈이 되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VTIC의 청려. 사진 몇 장 찍어서 올리면 돈을 더 주겠으니 자신에게 팔아달라는 사람이 많았던 거로 기억한다. 확실히 표정 좋지, 춤 잘 추지, 내 취향은 아니지만 잘생긴 외모까지 더해졌으니 말이다. 짧은 감상을 남기며 다시 무대를 찍는 것에 집중한 건우는 어느새 제 카메라에 시선을 맞추는 청려와 눈이 마주쳤다. 카메라를 인식하고선 입가에 호선을 그리는 모습이, 그래. 팬들이 좋아할 만도 하네. 저런 녀석이면 사랑받을 만도 하지.

 

덕분에 오늘도 돈이 되겠다. 이렇게 생각한 건우는 무대가 끝나자마자 최대한 자신의 아이돌과 같이 있으려는 사람과 대조될 정도로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돌아서려던 순간 필름에 남은 녀석의 눈과 마주친 것 같기도 한데, 착각이겠거니 싶어서 가던 길을 마저 갔다.

 

건우는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 통장에 입금된 액수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비싸게 팔린단 말이야. 오늘은 밖에서 원 없이 술을 마셔도 월세가 빠듯하지 않겠다 싶은 마음에 자주 가는 술집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생일이기도 하니까 자신에게 선물을 준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적당히 술에 취하지 않을 만큼만 먹어야지. 오늘따라 맥주가 달기도 달 테니까.

 

-

 

“어디야, 여기는…?”

 

평소보다 술이 좀 더 들어갔다고 이런 고급스러운 호텔에 오다니.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건우가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이 호텔에 지불해야 할 돈을 생각하니 앞날이 깜깜해졌다.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기왕 들어왔으니 제대로 이용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씻기 위해서 몸을 일으키자 평소보다 더 곱고 하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조명빨 죽이네. 이런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욕실로 들어간 건우는 내적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장난하냐?

 

“…….”

 

어제 찍은 아이돌이 왜 거울에 비치는 건데. 나는 분명 내 낯짝을 보려고 온 거란 말이다. 헛웃음을 짓던 건우는 천천히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조금은 거친 제 얼굴과 다르게 부드러운 피부는 요즘 잘나가는 아이돌다웠다. 어제 이 녀석의 사진을 찍어서 꿈을 꾸나? 자신의, 아니 청려의 볼을 세게 꼬집자 아픔이 몰려왔다. 시발, 꿈이 아니라고? 그 와중에 고작 1초 꼬집었다고 빨갛게 부어오르는 볼에 헛웃음이 나왔다. 살이 연하기도 하다.

 

한참을 멍하니 청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건우는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냐, 자각통일 수도 있지. 요즘 내가 너무 피곤했던 거다. 스스로 결론을 내린 뒤 우선은 호텔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씻고 나오자,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기본 벨소리네. 짧은 소감을 남기고서 화면을 보자 [VTIC 주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받아서 뭘 어쩔 건데 싶다가도, 왠지 모르게 받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느낌에 받아버리고 말았다. 받아서 뭘 어쩔 건데 진짜.

 

[ 재현이 형. 먼저 촬영장으로 간 거예요? 아직 차에 안 탔길래. ]

 

꿈이 왜 이리 현실적이냐. 촬영장?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입을 여는 순간 들킬까 봐 건우는 함부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꿈에서 난데없이 화보 찍게 생겼다며 속으로 한숨을 쉰 건우는 짧게 말하고 넘기기로 정했다. 사실 꿈이니 그냥 무시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래도 아이돌의 화보장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촬영장에서 녀석들을 담아내는 카메라, 조명 같은 게 말이다.

 

[ 재현이 형? ]

 

“...잠깐만 기다려줄래? 곧 준비해서 나갈게.”

 

말투 존나 어색한 거 봐라. 그래도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말투니 괜찮다. 이렇게 합리화했음에도 민망했던 건우는 바로 전화를 끊은 뒤 눈에 띄는 옷들을 걸쳤다. 이게 무슨 아이돌 체험기인지 모르겠다만, 들키는 순간 청려에게 바로 병원 예약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남의 몸으로 병원을 가게 되는 건 피하고 싶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차를 탈 수 있는지, 차는 어떤 종인지 알지도 못한다는 걸 한참 후에야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멍청한 새끼. 근처의 벽에 머리라도 박으려는 와중에, 인터폰 벨이 울려 퍼졌다. 1군 아이돌이 머무는 호텔 방에 찾아올 정도면 멤버, 매니저, 아니면 스토커 말고 없지 않나. 조금은 긴장이 어린 채 인터폰 화면을 보자, 건우 자신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목소리가 가라앉아있길래, 혹시 아픈가 해서 찾아왔어요. ]

 

이 녀석이 주단이던가. 아까 연락을 준 녀석이었다. 그렇다면 말투는 합격이라는 거군. 건우가 바로 문을 열어주자, 인터폰 화면에서도 보이던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한 녀석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막내였지.

 

“…헉, 무슨 일… 아, 아니. 혹시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거예요?”

 

오늘따라 인상이 더럽다고 대놓고 말하지 그러냐. VTIC에서 청려 다음으로 침착하고 어른스럽다는 말이 자자하던 녀석이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막내였다. 건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뻔했다. 하지만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VTIC이 서로에게 그렇게 죽고 못 사는 녀석들로 보이지 않았거든.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방으로 들어오니 가방에 있던 화장품을 꺼내기 시작했다. 건우는 그런 녀석의 모습을 가볍게 무시했지만, 잠시 후 화장품 중 하나를 자신에게 내밀어서 속으로 조금은 놀랐다. 스케줄 가기 전에도 화장해야 하나? 청려에겐 별로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멀뚱히 화장품을 쳐다보자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뚜껑을 열어서는 붓으로 내 뺨에 발라주더라. 한쪽만 바르는 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건우는 그냥 넘기기로 했다. 뾰루지라도 발견했나 보지.

 

-

 

차 안의 불편한 공기 때문에 숨 막혀 죽게 생겼다. 저 녀석, 눈치는 빨라서 아까 전의 부자연스러운 손을 알아차린 것 같았거든. 쓰다듬어주려고 했다기보다는 때리려고 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냐. 건우는 괜히 제 발이 찔려 상냥하게 말을 걸지만, 반응하라는 막내 녀석 대신 다른 둘이서 오늘따라 형이 말이 많다며, 형도 심심하냐는 질문만 들었다. 원래 이리 말이 많나? 그러고 보니 아까 눈을 마주치자마자 표정으로도 기겁하는 게 보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왼쪽 끝을 보자 모든 게 귀찮은지 이어폰 끼고 눈까지 감은 한 녀석까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딱히 기억이 안 나는데, 메인보컬이던가. 어쨌든 돌아가는 그룹 꼴이 콩가루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잘도 같이 스케줄을 하네. 이런 쓸데없는 거나 생각하던 건우는 바깥이나 구경하기로 했다. 도로 표시판을 보자 다른 지역이었다. 다른 지역이라 호텔에서 잤던 거였군. 건우가 입을 다물자 막내 녀석도 입을 아예 다물었고, 가장 시끄럽던 둘도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잠이 들었는지 조용해졌다. 이제 나도 자볼까 했지만 꿈이라고 생각하니 당연히 잠이 올 리도 없었다.

 

한참을 창문만 바라보다가, 어느새 촬영 장소에 도착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자던 녀석들을 깨워야겠다는 생각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녀석, 채율이던가, 암튼 머리카락이 복슬복슬한 녀석의 어깨를 세게 흔들자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으응, 혀엉- 오늘따라 너무 거칠게 깨우는 거 아냐…?”

 

뭘 얼마나 상냥한 손길로 깨워줘야 하는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자 이상하다는 눈초리가 따라왔다. 아, 왜. 뭐. 한참을 건우의 눈치를 보는 듯이 굴던 녀석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열었다.

 

“형. 만약 컨디션이 안 좋다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병원에 가야 하니까….”

 

뭐야. 이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나? 건우는 알겠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더 의아하다는 눈빛이 따라왔다. 아니 내가 또 뭘 잘못했는데. 한참을 찝찝해했지만, 어차피 꿈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자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꿈에서 깨면 사라질 잔상이 아니던가.

 

“어머, 청려 씨! 뺨이 왜 그래요!”

 

“…네?”

 

“뺨이 부었잖아!”

 

그 후로는 거울을 보지 않아서 몰랐다. 그렇게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아직도 뺨이 부어있었단 말이야? 건우는 이제야 막내 녀석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뺨을 때린 자국이 남아 있어서 가리라고 했던 거군? 이 자식의 피부는 어떻게 되먹은 거야. 대답을 어물쩍 넘기려고 하기 전에, 우선 컨실러로 가리자는 말이 나왔다. 이에 알겠다고 답하자, 우선 옷을 갈아입고 나오라며 스타일리스트가 분장실로 이끌었다. 서로 자기 일을 체크하느라 바쁜 곳이었다. 딱히 이런 곳에 로망이라도 있던 게 아니라서 별 감흥은 없지만.

 

옷을 갈아입고 화장까지 마무리하자 세트장 안으로 들어가라는 지시가 들려왔다. 스타일링으로 보면 이번 활동 컨셉과 유사한 화보를 찍는 것 같았다. 여기서 건우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같은 걸 모르기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는 거다. 자세나 이런 건 데이터 팔이를 하도 해서 대충 잡을 수는 있었는데.

 

“오늘따라 청려 군이 왜 이럴까. 조금은 집중해 줘!”

 

“아, 네.”

 

결국, 이상하다는 눈초리와 함께 촬영이 끝났다. 세 번이나 지적당하고 나서야 어제 프레임에 담았던 녀석의 표정을 상상하며 표정을 지었더니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냐는 말만 잔뜩 듣기만 했으니, 이쯤 되면 건우도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다들 유난인데. 청려는 컨디션 난조도 없는 로봇 같은 녀석이냐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건우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숨이 막혀 차라리 걸어가겠다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인 상황을 겪고 있었다. 아무래도 메인보컬을 제외한 세 명은 제 형이 계속 지적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되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꿈인데 왜 이리 피곤하지. 건우가 한숨을 푹 쉬며 자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잠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후 조용해졌다. 꿈에서도 잘 수가 있던가. 뭐 안될 게 뭐가 있겠어. 꿈에선 뭐든 다 이루어지는데.

 

-

 

일어나보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밴 안이 아닌 낡은 집의 천장이었다. 귀소본능이 제대로 발동한 모양이군. 내가 1군 아이돌이 된 꿈을 꾸다니,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개꿈이겠거니 싶었다. 어제 유난히도 청려가 눈에 들어와 신경이 쓰였다던가. 건우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기 전에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켰다. 오늘 날짜는 …10일? 내가 온종일 자기만 했다고? ……알바. 급하게 전화 화면으로 넘어가 부재중 전화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부재중은 없고 전화를 받았다는 내역만 남아 있었다. 자는 사이에 받아서 헛소리라도 했으면 어떡하냐. 건우는 전화하기 적당한 시간대인 것을 보고 아르바이트하는 곳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자 오늘 몸은 괜찮냐는 질문을 받았다. 적당하게 대답해둔 모양이었다. 오늘은 나가겠다는 말에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아픈 건 아니니 나가겠다고 답했다. 사장의 인심이 좋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잘릴 뻔했네.

 

…정말 꿈을 꾼 게 맞나? 사실은 둘의 영혼이 바뀌어 어제의 일이 현실이었으며 어제 답장한 녀석이 청려라면? 그런데 내가 걔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딴 개연성 없는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건우는 어차피 기억에도 거의 없는 꿈을 더 길게 생각하기도 귀찮아졌다. 취업준비생으로서 본분을 다하다가 알바나 하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책을 펼친 후로 시간은 금방 갔고, 어느새 일하러 갈 시간이 다가왔다. 꿈에서도 느낀 거지만 시간은 정말이지 빨리 간다니까. 허무맹랑한 감상을 남긴 건우는 나갈 준비를 마친 뒤 집을 나섰다. 음식점에 들어서자마자 사장에게 인사를 함과 동시에 무언가 꺼내서 건네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디 아프다고 둘러댄 모양인데, 자신이 그 정도로 꾀병을 부렸다니.

 

“어제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늘고 힘이 없어 보여서 목이라도 아픈 건가 했단다. 오늘 갈 때 챙겨가렴.”

 

그래도 저지른 거짓말에 어떻게 할 방법이 있나. 건우는 기왕 거짓말을 해버렸으니 어느 정도 따라가기로 했다. 지금은 괜찮다는 사실을 섞어서. 평소보다 가늘다, 라. 한참은 그 말이 맴돌아 일이 끝날 때까지도 함께 했다. 이런 걸 계속 떠올렸다는 것에 짜증이 치밀어 녀석의 목소리가 담긴 컨텐츠라도 봐야 하나 싶은 마음에 쓸데없는 고민마저 하게 되었다.

 

결국,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은 뒤 누워 위튜브에 청려의 이름을 검색하자 직캠 영상이 맨 위에 떠 있었다. 이걸로는 말투를 알 수가 없잖아. 패스. 직캠을 넘기자 팬싸 영상이 있었다. 저기선 어차피 깨만 볶고 함성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잖아. 패스. 한참을 내려간 끝에 덥앱의 일부분을 담은 듯한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12월 9일, 어젯밤의 것이었다.

 

[ …됐다. 하하, 티카들. 잘 지냈어요? ]

 

휴대폰의 위치를 고정하는 건지 한참 동안 화면이 흔들렸다. 말투가 나긋나긋하네. 어르신들이 듣기에 따라서는 힘이 없어 보일 만도 했다. 내 말투랑은 180도 다르고. 하지만 기억이나 잘 나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는 판타지 소설 같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고 단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 원래는 동생들이 도와줬는데, 오늘은 좀 피곤했는지 자고 있어서요. ...자는 모습 보여달라고? 보여줬다가 티카들의 환상이 깨지면 어떡해. 우리 애들 잠버릇이 좀 대단하거든요. 특히 신오와 채율이가. ]

 

들으면 들을수록 말투는 고사하고 말하는 높낮이부터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우는 꿈의 내용을 기억해내려고 애썼지만, 청려가 되어 카메라 앞에 섰다는 것만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더 자세한 걸 원하는데 말이지. 이걸로는 어떠한 단서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 오늘따라 빨리 자는 것 같다고요? 스케줄 때문에 그럴 거예요. 좀 멀리 다녀왔거든. 무슨 스케줄인지는 비밀이지만요. ]

 

이게 만약 꿈이 아니라면 그 스케줄을 내가 소화한 거로 되는 건가. 이러한 생각과 동시에 괜스레 미안해져 위튜브를 끄려고 했다. 청려의 말투와 어조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긋이 화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끌 수가 없었다. ...새삼 잘생기긴 했지. 한참 얼굴만 보느라 녀석이 하는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어느새 영상은 끝이 나 있었다. 새벽은 순식간에 지나간 터라 현타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또 땅굴 들어가기 전에 잠이나 자자.

 

-

 

신경 쓰여서 잠도 제대로 못 잤네. 햇빛이 들어오자 눈을 찡그리고는 천천히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잠깐, 햇빛? 침대? 반지하의 자취방엔 그런 건 없었다. 설마 하며 일어서자, 저번만큼의 화려한 호텔은 아니었지만 깔끔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딱 1군 아이돌 숙소 방 같았다. 이번엔 숙소냐고. 이렇게까지 상황이 진행되니 이건 꿈이라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어떠한 스케줄이 없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형~ 스케줄 없다고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는…, 이미 일어났네! 잘 잤어?”

 

뭔 말을 해야 어색하지 않을 수 있지? 첫날에도 언급했지만, 남의 몸으로 병원에 가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마침 자기 전까지도 청려의 영상을 봤으니 따라 해야겠다는 본능이 이성을 이겼다. 그렇게 다짐하니 말을 꺼내기는 쉬웠다. 건우는 어제 영향의 말투와 어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너도 잘 잤나… 잤어?”

 

“응?”

 

하필 존댓말을 써대서 말이야. 예능을 볼 걸 그랬나 보다. 채율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눈이 동그래져서는 아직 잠이 덜 깼냐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건우는 의식적으로 하하, 하고 웃으면서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라며 답했다. 그러자 그럼 다시 자야지! 라는 말과 함께 침대에 눕혀지고 말았다. 고작 살짝 밀려났을 뿐인데 넘어진 거냐고. 얼마나 종이 인간인 거야.

 

“그럼 배고플 때 나와~ 형 몫은 남겨둘게!”

 

건성으로 대답한 뒤 녀석이 문을 닫자마자 방을 둘러보며 휴대폰을 찾았다. 청려 본인이 눈치가 있다면 이 사태를 예상했을 테니 연락을 취해야 했다. 사실 오늘 아르바이트는 꼭 가야 하는 것도 있고. 방금 말한 녀석에 따르면 청려는 이미 깨어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청려가 수신자 정보가 없는 번호의 문자는 받지 않게 설정했을 수도 있었다. 설정을 푸는 순간 온갖 스토커성 문자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 그건 좀 사양하고 싶은데.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면 이때의 일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제의 내가 그랬으니까. 그렇다는 소리는 상대방도 기억을 잃었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청려는 그제 스케줄이 있었고, 온종일 같이 사는 사람이 있었으니 기이함을 빨리 눈치챘을 수도 있다. 그러니 우선은 청려와 대화를 시도해야 했다. 무력하게 언제 몸이 돌아올지 모르니 불규칙한 생활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제 번호로 연락을 넣고 차단을 풀기엔 감내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나도 컸다. 무려 1군 아이돌의 폰이라고. 그렇다면 방법은 메모뿐이었지만, 휴대폰의 메모창을 찾아보니 캘린더밖에 나오지 않았다. 중요한 일은 글로 쓰는 편인가 보지. 결국 책상 위에 놓여있는 메모지를 뜯어서 간략하게나마 적을 수밖에 없었다.

 

[ 네 몸 빌려 쓴 사람인데, 너도 현재 이 상황을 의심한 적 있냐? ]

 

뭔가 이상하잖아.

 

[ 네 몸 빌려 쓴 사람인데, 너도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내가 네 몸으로 8일 화보 스케줄을 했었거든. 네 기억에도 그 활동이 기억 안 나면 여기에 답장하고 맨 아래 서랍장에 넣어둬라. ]

 

아까보단 말이 길어졌지만 제대로 이해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쪽지를 어디에 둘지 고민하다가 옷장 안쪽 벽에 붙이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이제 할 것은……, 없었다. 그저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 말고는. 뭔가 먹으러 나가기에는 이상하게 배도 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은 현실일 텐데도 말이지.

 

-

 

내가 언제 잤더라. 깨어나자 보이는 천장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다시 돌아왔군. 건우는 휴대폰을 켜서 바로 날짜를 확인하자마자, 이제는 꿈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루의 절반 이상이 지나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아르바이트 시간 전에는 돌아왔네. 이게 무슨 아이돌 체험기도 아니고 뭐냐. 어쨌든 그는 일하러 가기 위해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본 순간 욕이 절로 튀어나왔지만 말이다.

 

“시발, 미친놈 아니야?”

 

건우의 볼에 단정한 글씨체로 <신재현> 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왜 남의 얼굴에 네임펜으로 지 이름을 적어놓고 난리야? 욕을 난무하며 급하게 물로 벅벅 지우고는 거울로 붉어진 뺨을 보자 첫날 봤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뺨 한 번 쳤다고 바로 붉어졌지. 그거 복수라도 하는 거냐? 청려에게 들릴 리도 없는 욕을 지껄여준 건우는 희미해진 얼룩을 바라보고는 마저 씻었다.

 

이후 건우는 언제나의 루틴처럼 휴대폰을 켜다가, 바로 떠 있는 녹화 앱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 자식이 남의 폰을 막 봐? 하지만 자신도 청려의 휴대폰을 봤으니 할 말은 없었다. 그저 한숨을 쉬며 뒤로가기를 누르려는 순간 오늘 자로 업데이트된 음성파일에 잠시 멈칫할 뿐이었다. 혹시 그 녀석도 이상함을 느끼고 내게 연락을 취하려고 했던 걸까? 파일은 듣기 딱 좋은 길이였으니 듣기로 마음을 정했다.

 

[ 아, 아. 들리려나? 뭐, 들리겠지. ]

 

아주 잘 들린다. 내 목소리로 저런 말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네.

 

[ 안녕하세요, 류건우 씨. 내 폰, 수신자 정보가 없는 사람의 연락은 차단되니까 문자나 연락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녹음으로나마 남겼죠. 네 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주고 싶었으니까. 아, 녹화되는 걸 딱히 좋아하지 않으니 다 보고 나서는 지워주세요. ]

 

제 목소리로 저런 말투를 구사하는 영상을 본 건우는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상했지만 존나 안 어울려. 그나저나 녹화 당하는 게 싫다면서 메모지 대신 음성파일을 택했다는 것에 모순이 느껴졌다. 마땅한 메모지가 안 보였나 보지.

 

[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음……, 얼굴에 굳이 이름을 적은 게 맘에 안 든다면 미안해요. 일어나서 바로 보라는 의미였거든.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니까요. ]

 

그래. 어떤 영화가 떠오르긴 했다만, 확실히 안 볼 수가 없는 방법이긴 하다. 그렇다고 이 짓이 정상이란 건 아니다. 애초부터 아이돌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면 네 녀석의 이름을 모르는 게 어렵지 않겠냐고. 물론 이번 일을 기점으로 신재현이라는 본명을 알게 된 거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런 말이나 하겠다고 굳이 녹화까지 한 건 아니겠지?

 

[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라서 당황했을 수도 있는데, 너무 걱정하지는 마요. 곧 완전히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거든. 내가 감이 좋은 편이니까 믿어도 좋아요. ]

 

네 말이 더 비현실적인데 어쩌냐. 다른 건 몰라도 이 녀석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알겠다. 영혼 바뀐 걸 들키면 안 되는 사람은 나보단 너 아냐? 건우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의문이 드는 게 당연했다.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녹음 파일이 끝이 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짧은 고민 끝에 우선은 현생을 위해 움직이기로 정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집중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사장에게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오후 아르바이트 전에 깨서 다행이었다. 3일 전엔 영혼이 바뀌어 있느라 나오지도 못했으니…, 잠깐. 왜 이번엔 바뀌어 있던 시간이 왜 이렇게 짧았지?

 

[ 너무 걱정하지는 마요. 곧 완전히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거든. 내가 감이 좋은 편이니까 믿어도 좋아요.

 

만약 영혼이 바뀌어 있는 시간이 정말 줄어가고 있는 거라면, 청려는 아이돌이 아닌 무당을 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무당으로 썩기에 아까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다음에 바뀌고 나서 돌아오는 시기가 더 빨라지기만 한다면 이 가설이 맞다고 할 수 있겠지. 결국, 건우는 이 생각만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약간의 잔소리를 들으며 일을 끝냈다.

 

오늘 하루도 잡생각이 많아져 피곤했기에 집에 오자마자 씻고 바로 잠자리에 누운 건우는 SNS 창을 켰다. 스팸 문자 말고는 온 게 없어서 바로 다시 꺼버렸지만. 하긴 내 전화번호를 외웠을 리가 없지. 이대로 자면 다시 혼이 바뀌는 건가 싶어서 조금은 찝찝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청려의 말대로 곧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믿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건우가 아침에 일어났을 땐, 녀석의 숙소나 호텔이 아닌 자신의 낡은 집에 있었다. 이제 완전히 끝이 난 건가? 그렇다면 이제 원래의 생활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바뀌지 않은 몸으로 청소도 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괜찮은 요리를 만들어서 먹고, 늦장을 부리다가 일하러 갔다. 어쩌다 몸 상태가 바뀐 건지는 끝내 알 수 없는 건가 싶어져 찜찜해졌지만. 어쨌든 오늘은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내일도 평범한 생활이 계속 이어질 테니.

 

-

 

하지만 깨어났을 때, 기대와 다르게 이곳은 집이 아닌 깔끔한 호텔이었다. 어제 바로 집에 들어왔으니 잘못 들어왔을 리는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거울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청려의 얼굴이 비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건가? 살짝 흐트러진 샤워 가운을 정돈한 건우는 씻기 위해 움직였다. 어차피 씻으러 갈 거라면 의미가 없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남의 몸을 보는 건 좀 민망해서였다. 남자끼리라도 남의 몸을 막 보는 건 좀 그렇지.

 

이틀 전에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던 시간대는 오후를 막 넘겼을 때였다. 그러므로 이번에 그보다 더 빨리 돌아간다면 청려의 감이 맞게 되는 것이다. 스케줄이 있다면 연락이라도 주겠지 싶었다. 결국 씻고 다시 침대로 누워버린 건우는 호텔 침대의 폭신함을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지만 않았어도 더 편하게 있었을 것이다.

 

“좋아 보이네요?”

 

내 몸, 그러니까 청려 이 자식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건우는 제 표정을 직접 보진 못하지만, 바보처럼 보일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야 내 얼굴로 기분이 나쁠 정도로 실실 웃어댔으니 말이다. 저 입에서 뭔 말이 나올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하하, 진짜 놀랐나 보네. 그동안 내 얼굴 근육이 거기까지 움직인 적이 없었을 텐데.”

 

“나도 그딴 표정 지은 적 없거든. 소름 돋으니까 그딴 표정 치워라.”

 

건우는 눈을 반 접어가며 살포시 웃는 제 모습, 그러니까 청려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네 녀석의 얼굴로는 어울릴지 몰라도 내 얼굴은 아니란 말이다. 한숨을 푹 쉰 건우는 팔짱을 끼며 눈앞의 사람을 마주 보았다. 이렇게 되었으니 하나보단 둘의 머리가 낫겠지. 머리라도 맞대보자고.

 

“너 왜 여기에, ……됐다. 너 오늘 스케줄 없냐?”

 

“밤에 있긴 한데, 그 전에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네가 감이 좋다는 거 말이야.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냐. 네가 신내림이라도 받았다고 하고 싶은 거야?”

 

“그냥 해본 말이라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내가 말한 대로 됐잖아요.”

 

“…넌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냐?”

 

건우의 말에 청려는 잠시 멈칫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쭈. 지금 뭔가 찔린 게 있는 모양인데. 녀석이 알고 있는 걸 탈탈 털어낼 목적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최대한 몰아붙여서 다 불게 해야 한다.

 

“너, 이 상황에 대해 아는 거 있지.”

 

“그럴 리가요. 하지만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건 사실이에요. 어차피 돌아올 거 아냐. 어떤 식으로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이 녀석, 말을 두루뭉술하게 하는 버릇이 있는 듯했다. 짜증 나게 구네. 인상이 찡그려진 게 눈에 보였는지, 녀석이 눈앞까지 다가와 제 손으로 미간을 펴주었다. 내 얼굴인데도 묘하게 웃는 상으로 바뀐 느낌이라 기분이 영 이상했다.

 

“조심해야죠. 명색에 아이돌인데 벌써 주름이 생길 수는 없잖아.”

 

넌 그게 문제냐. 건우는 한숨을 푹 쉬며 녀석의 손을 물린 뒤 인상을 폈다. 거기에다가 논점이 이상한 곳으로 간 게 보여 다시 잡아주기로 했다. 넌 관심이 없어도 난 알아내야겠거든?

 

“그래서 이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이거야?”

 

“아무래도. 건우 씨도 모르니까 내게 물어보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사람이 할 말 없게 답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건우는 한숨을 푹 쉬며 더 캐묻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지금 물어봤자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입만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도 아파지기 시작하고.

 

“저번에 제 방에 쪽지 뒀죠. 얘들에게 들킬지도 모르는데, 꽤 대범하네?”

 

“위험한 행동이었다고 화내는 거냐?”

 

“하하, 그런 건 아닌데. 찔리나 봐요?”

 

“아닌데.”

 

한참 동안 서로의 말을 왜곡하며 비꼬다가 순간 현타를 맞은 건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이 녀석이랑 뭐 하는 거지. 자신이 입을 다무니 청려도 딱히 더 할 말은 없는지 조용해졌다. 할 말이 없어져서 조용해졌다기보다는, 피곤한지 눈이 아픈 건지 조금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이제는 비틀거리기까지 하네.

 

“야, 피곤하면 눈이라도 붙이지 그러냐. ”

 

“…하지만, 이대로 자면.”

 

“자면 큰일이라도 나는 거야?”

 

그건 아닌데, 하고 웅얼거리는 제 목소리를 듣자마자 건우는 조금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아침부터 조는 녀석을 보니 사람이 맞긴 맞구나 싶어서 재우고 싶어졌다. 로봇 같은 아이돌인 줄 알았더니. 그래, 깨어난 다음에 캐묻는 게 낫지. 지금 물어보면 건성으로라도 뭐든 대답해주겠지만, 조는 사람을 괴롭혀서까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의욕이 조금 상실당했다고 해야 하나.

 

“야. 앉아서 졸지 말고 누워서…”

청려가 나를 덮치듯 쓰러지는 건 한순간에 일어났다. 이 정도로 피곤했으면 몸이 바뀔 때까지 집에서 좀 자던가. 어쨌든 침대 가장자리에서 이러고 있는 건 힘들기도 했으니 녀석을 가운데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녀석을 왼쪽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갑자기 잠이 몰려오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거다. 뭐지? 깬 지 얼마 안 됐으니 잠 같은 게 올 리도 없었다. 기시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몰려오는 잠을 어떻게 할 도리도 없었다.

 

시발, 이대로 잠들면 백 퍼센트 내가 녀석을 덮친 자세가 되어버릴 텐데. 보통 졸린 건 참을 수 있는데, 이번엔 손 하나 까딱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졌다. 몸을 못 가누겠는 게 조금 전 청려의 증상이랑 비슷한데. 설마 수면도 동기화가 되어버린 건 아니겠지?

 

-

 

“…씨.”

 

시끄럽게 누가 중얼중얼하는 거야.

 

“건우 씨.”

 

……내 이름?

 

“건우 씨, 무거워요.”

 

시발, 이게 무슨. 언제 돌아온 거야. 건우는 청려의 목소리에 바로 정신을 차려서 일어나려다가 부드러운 이불에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녀석의 몸에 넘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녀석의 목덜미 쪽에 입술을 묻어버린 꼴이 되어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바로 들려오는 신음에 괜히 미안해졌다. 바로 청려에게서 떨어지는 대신에 고개를 들어 녀석의 얼굴을 봤으나,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졌다. 이 자식이.

 

“…지금 재밌냐?”

 

“하지만, 웃기잖아요. 지금 건우 씨 표정이 진짜,”

 

진짜 꼴 받네. 건우는 넘어진 상태로 한숨을 푹 쉬자 목덜미가 간지러운지 움찔거리며 웃는 청려를 바라보았다. 분위기 묘해지게 지금 뭐 하는 거람. 하지만 자신이 이 상황을 초래했다는 것을 자각하자 갑자기 민망해진 건우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대로 있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거다, 분명히.

 

“벌써 가게요? 서운하네.”

 

“…우리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라.”

 

이다음에 녀석이 뭐라고는 말한 것 같은데, 건우는 마지막 말만 뱉은 뒤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버려서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뭐든 그리 영양가 있는 말은 아니었을 테니 궁금하지는 않지만. 청려와 있을 때 보지 못했던 시간을 휴대폰으로 확인하자, 아직 오전이었다. 아직 오전이라는 것을 보아, 점점 몸이 바뀌어 있을 시간이 줄어든다는 가설은 어느 정도 성립이 되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만날 때는 더 빠르게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

 

하지만 그 이후로, 일주일 동안 몸이 바뀌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번 호텔에서의 첫 만남이 끝이었다는 것처럼.

 

-

 

다시 몸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확신하고서도 건우는 한동안 아이돌 사진을 찍으러 갈 엄두를 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VTIC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청려 그 녀석 때문이지만. 이 자식들, 도대체 언제 활동이 끝나는 건데? 하지만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알바비만으로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으니까.

 

캡 모자를 꾹 눌러쓴 건우는 간만에 카메라를 들었다. 오늘이 VTIC의 막방이라도 했던가. 그렇다면 보통 아이돌답게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더 집중할 테니, 들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방송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천천히 움직였으므로 당연히 좋은 자리를 선점하지 못했다. 그래도 평소처럼 찍으면 잘 나오고 돈도 더 벌 수 있을 테니까. 카메라에 렌즈를 끼운 후 초점을 맞추며 시범용으로 앞의 무대를 선보이는 여돌을 찍고 데이터를 확인했다. 괜찮게 나왔네. 데이터로 팔기 위해 다른 그룹의 사진을 찍다가, 어느새 VTIC의 무대 시간이 다가오자 배터리와 렌즈를 점검한 뒤 카메라 렌즈로 녀석들 중에서 청려를 응시했다. 저번 주와 다를 게 없었다.

 

MR이 흘러나오자마자 컨셉에 걸맞은 표정을 한 청려가 시작을 열었다. 대놓고 섹시 컨셉이던 저번 활동과 다르게 이번엔 정장을 입은 채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는 절제된 섹시함을 보여주는 모습이 녀석과 어울린다 싶었다. 표정과 안무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이는 게 보였다. 홀린 듯이 무대를 감상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건우는 청려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찍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무표정으로 안무하다가, 방송 카메라가 자신을 찍는다 싶으면 살짝 미소를 띄우던 모습이 한 편의 작품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너무 청려만 찍고 있나? 이대로는 녀석의 데이터만 잔뜩 남겠다 싶어서 옆에 있는 멤버도 찍으려고 했다. 갑자기 청려가 입만 움직이지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 건. 우. 씨.

 

제 파트가 아닐 때 내 이름을 입 모양으로 말하며 눈웃음치는 모습. 아까까지 청려 홈마인 것처럼 청려만 카메라에 담고 있었으니 건우 입장에서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자식. 설마 무대 중에 내 이름을 입 모양으로 말한 거야? 들키면 어쩌려고! 급하게 다시 카메라에 청려를 담았지만, 그는 이미 방송 카메라에 집중한 상태였다. …뭐야.

 

뭐, 그래. 어차피 나는 일개 데이터 팔이고, 너는 아이돌이다 이거지. 건우는 조금 씁쓸해졌지만 이럴 이유도 없다며 자신을 달랬다. 그러므로 자신을 향해 꼬리를 흔들던 녀석 덕에 오늘도 돈이 되겠다며 무대가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뒤돌아서려고 했다. 뒤를 돌기 전, 자신과 시선을 맞춘 뒤 녀석이 입을 열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 오늘, 마지막, 호텔.

 

시발, 뭔 아이돌이 무대에서 저런 말을 입 모양으로 해대. 건우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스럽게도 청려의 입 모양을 캐치해낸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워낙 작은 입으로 오목조목 말해대서 나만 본 거라던가. 오늘 그곳에서 만나자는 거냐고. 내가 그걸 기억한다고 생각하냐? 집 근처였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고.

 

…정말 기억 안 난다. 나는 안 갈 거다, 절대로. 거기서 계속 기다리다 네가 서리 맞든 말든 알 바가 아니라고. 알겠냐?

 

어쨌든 안 갈 거다. 네 사진 찍겠다고 너무 진이 빠졌다고. 건우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답변을 하며, 천천히 제 집으로 향했다. 집 근처에 도착해서 동네에서 가장 큰 호텔에 시선을 보냈지만, 단순히 눈길이 간 것뿐이라고 변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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