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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anic

W.먐몀(@_ichiban12)

박문대는 당황스러웠다. 분명 소파 위에서 영화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든 것 같은데,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좁은 방안의 풍경과 낯선 사람들이었다. 자신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던 남자는 제대로 말을 걸기도 전에 파티를 즐기러 갈거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박문대는 곧바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조금 허둥댔지만, 분위기와 자신의 모습, 울렁이는 바닥까지. 곧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깨닫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박문대는 익숙하게 상태창을 불렀다. 

[돌발!]
상태이상 : '탈출이 아니면 죽음을' 발생!

['탈출이 아니면 죽음을']
타이타닉호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 까지 배에서 탈출해 살아남지 못할 시, '이방인'의 소멸. 

남은 시간: 23:59

긴 시간이 걸리고, 비현실적인 일에는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영화안에 들어오는 일 까지 가능해질 줄은 몰랐다고 박문대는 생각했다. 자신을 '잭'이라고 불렀던 친구의 말을 떠올리고서 하필 잠들기 직전에 보던 영화가 '타이타닉'이라는 사실에 통탄해야 했다. 어째서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살아남아야 했다. 아직 해야할 게 많은데 이런데서 영문도 모른 채로 죽을 수는 없지.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하루. 상식적으로 이 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고가 나기 직전에 이 배의 관리자에게 빙하의 존재를 알리면 충돌은 막을 수 있다. 그렇게 빙하만 잘 피한다면 빙하가 충돌해 배가 침몰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잘 풀릴까. 애초에 내 의지대로 피하는것이 가능한 사고일까. 애초에 이방인의 소멸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박문대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박문대는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던 방에서 나왔다. 우선은 배 안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어디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모두가 들뜬 파티의 배 위에서, 박문대는 홀로 덤덤하게 배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건지 아니면 전의 '잭'에게 관심이 있었던건지, 박문대는 어느 귀부인의 손에 붙들려 낡은 옷을 벗고 귀족들이 입을 법 한 정장으로 갈아입혀지고 있었다.

"어쩜, 우리 아들의 옷이 딱 맞구나! 네게 꼭 어울릴거라고 생각했단다."

아무래도 양쪽 다 틀린 모양이다. 이건, 영화의 흐름대로 상황이 진행이 되고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영화 타이타닉 안에서 잭은 어느 부인의 도움으로 초대에 걸맞는 옷차림을 하고,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오히려 지금까지 혼자 방안에 있었다는게 더욱 이상한 흐름인거겠지. 박문대는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뒤로 넘기고 흐트러진 커프스를 고쳤다. 박문대는 부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파티장으로 향했다. 여주인공인 로즈를 만날 차례였다. 

파티장안에서 흘러나오는 악기소리가 입구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우아하게 흔들리는 치맛자락, 바닥을 두드리는 지팡이소리까지 홀 안을 채우고 있는 모든것들이 박문대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다. 귀족의 파티란 이런것이라는걸 몸소 체험하며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박문대는 꽤나 애를 써야했다.  파티분위기에 들뜬 많은 사람들이 박문대에게 다가와 호감을 표하며 인사를 했다. 부인은 하나하나 박문대를 그들에게 소개시켜주며 웃음지었다. 그러나  정작 찾고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박문대는 애가 탔다. 파티장을 한바퀴 돈 것 같은데도 아직 로즈를 만나지 못했다. 이상하네, 영화의 흐름대로 흘러가려면 진즉에 만났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부인도 그것을 느꼈는지 근처의 사람들에게 로즈에 대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몸이 안좋아서 일찍 돌아간 것 같다는 대답 뿐이었다. 결국 정신력만 소모하고서 허탕을 친 것이다.  

향수냄새에 머리가 아파온 박문대는 슬쩍 자리에서 빠져나와 바람을 쐬기 위해 뱃머리로 나왔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며 옷에 진하게 벤 향수냄새를 어느정도 날려주었다. 뒤죽박죽 얽혔던 머릿속도 어느정도 맑아지는 것 같다. 박문대는 근처에 놓여있는 벤치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씨라서인지 마치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처럼 하늘 가득 총총히 빛나는 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후배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박문대는 그대로 잠깐 눈을 붙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피로를 확 깨울 정도로,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목소리는 친근했다. 그럴 수 밖에. 영화를 보며 잠들기 직전까지 들었던 목소리였으니까.

"왜 이런곳에 있어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저는, 눈을 뜨니 연회장이더라고요. 약혼자를 극진히 챙기는 남자를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왔습니다."
"그런 정보는 별로 알고싶지 않고."
"하하,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는 저보다 후배님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이쪽은 짐작가는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하아... 나도 몰라. 깜빡 잠들기 직전까지 이 영화를 보고 있었을 뿐이니까."
"영화요?"
"어, 타이타닉. 너랑 통화하면서 보고있었거든. "
"그렇군요. 그럼 저는 후배님이 마지막으로 본 영화 때문에 '로즈'가 된거군요."
"로즈? ......여주인공말이야?"
"네, 여주인공."

박문대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즈려물었다. 혹시 여주인공인 로즈가 신재현에게 관심을 가지기라도 했나, 라고 가볍게 생각했건만 오히려 본인이 로즈가 될 줄은 몰랐다. 애초에, 신재현은 여자가 아닌 남자인데도 상관 없는건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이 로즈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박문대는 생각했다. 그리고 문뜩 깨달을 수 있었다. 시스템이 말한 '이방인'은 두사람, 나와 신재현이라는 것을. 이 미션을 실패하면, 우리 둘다 죽는다. 

"어쨌든 시스템이 우리에게 여기서 뭘 하기를 바라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에 탈출해서 살아남아야 해. 남은 시간은 하루. 내일이 되면 이 배는 가라앉는다."
"그런가요. 생각해둔 방법이라도 있나요?"
"없어, 그런거. 빙하에 충돌하지 않는게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한데... 상황이 우리 뜻 대로 이루어질지도 의문이고. 때를 잘 노려서 보트에 올라타는 수 밖에. 원작처럼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박문대가 몸을 일으켜 생긴 옆자리에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앉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여주인공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색실로 포인트를 주고 작은 꽃으로 포인트를 준 하얀 정장을 갖춰입은 모습이 아름다워 보여서, 박문대는 한동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후배님? 꼭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농담을 해오는 그에게 박문대는 헛소리 하지 말라며 일침하고 싶었지만, 입꼬리를 올려 예쁘게 웃는 얼굴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신재현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는 별빛때문이라고, 귓가를 간질히는 잔잔한 파도소리 때문이라고 떠넘기며 자신을 속이면서도 오히려 몸은 신재현에게 가까이 기울여지고 있었다. 

박문대가 점점 그에게 다가갈수록 신재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며 동요를 나타냈다. 당연히 차가운 대꾸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치 침잠할 것 처럼 시선을 붙잡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채로 신재현은 덩달아 입을 꾹 다물었다. 아, 키스할지도. 신재현은 스쳐지나가듯 그렇게 떠올렸다. 그럼에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고도 덩달아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고개가 살짝 기울고, 숨결이 닿을 것 처럼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신재현은 박문대의 손길에 의해 뒤로 떠밀려졌다. 그리고 박문대는 신재현이 자신의 손길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순간, 그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로즈?"
"아."

문이 열리며 남자가 자신의 약혼자를 찾기위해 갑판으로 나왔다. 다행히 방금의 장면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두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로즈, 한참 찾았어. 그자와 함께 있었군."
"......."

신재현은 남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남자가 경계하듯 신재현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박문대의 옆에서 떨어뜨리려는 것처럼 자신에게 바짝 당겨안았다. 박문대는 이번엔 확실히 신재현의 눈썹이 움찔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남자가 신사적으로 웃으며 박문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저번엔 신세가 많았어. 다시한번 감사를 전하지. 이만 돌아가자, 로즈. 바닷바람이 차가워."

박문대는 그의 허리를 감고있는 남자의 팔을 내려다 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남자를 향해 웃으며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흔들었다. 가볍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남자는 신재현을 이끌고 숨기려는 것 처럼 몸을 돌렸다. 신재현의 몸집이 작은 편이 아니기에 전혀 가려지진 않았지만. 뚜벅이는 소리가 길어질수록 점점 벌어지는 간격과 얌전히 남자에게 순순히 따라가는 신재현의 행동이 박문대는 묘하게 불쾌했다. 왜 신재현이 그의 말대로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어차피 저 남자는 방금 만난 사이고, 약혼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신재현이 아니었다. 청산유수처럼 혀를 굴려 남자를 돌아가게 만들었겠지.

박문대는 혼자 갑판에 남았다. 방금까지 함께있던, 별빛을 녹여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짝이던 그사람의 눈동자는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박문대는 두사람이 사라졌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쓸데 없는 생각을 할 시간에 어떻게 안전하게 탈출할 지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박문대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상태창을 켰다. 

남은시간: 19 : 27

아직 충분히 여유시간이 있었다. 현재 박문대는 더이상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이미 항해하는 길목에 위험요소가 많다는 것을 여객선의 관계자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사고가 일어난 것은 견시들이 어둠속에서 조용히 나타나는 빙하를 제때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파티분위기에 들뜬 그들에게에게 빙하에 대한 얘기를 해봤자, 흘려들을 것이 뻔했다.
박문대는 머리를 흐뜨리고, 갑갑하게 느껴지는 재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침대위로 기어올라가 눈을 감았다. 몸도, 정신도 잔뜩 혹사당한 탓에 피곤했다. 휴식이 간절했다. 

-똑똑

박문대가 슬핏 잠이 들었을 무렵, 누군가 방 문을 노크했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가겠거니 했는데, 불청객은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것 처럼 계속해서 노크를 해왔다. 박문대는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짜증스럽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문을 열어줄때까지 노크를 해 올 기세라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방 문을 열어야 했다.

"도대체...."
"실례합니다. 여기에......."

박문대는 문을 열자마자 보인 낯선 얼굴에 허탈감이 들었다. 내심 끈질기게 문을 두드려오던 사람이 내심 신재현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낯선 남자는 방안에서 필요한 물건을 찾았는지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하고는 금방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다시 방안이 고요해졌다.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으니 희미하게 쿵쿵 울리는 악기소리가 들렸다. 파티장소가 생각보다 가까운 모양이다. 그 뒤로 박문대는 1시간이 지나도록 잠이 들지 못했다. 몸은 피곤하기 그지 없는데, 어째서인지 잠이 완전히 깨버린 탓에 어떻게 해도 잠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베개로 귀를 틀어막고 한참동안 숫자를 센 끝에서야 박문대는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드디어 잠이 들 수 있겠다며 안도한 박문대는 그대로 의식을 놓았다.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방안은 금세 뒤척이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졌다.

.
.
.

박문대는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상태창을 확인했다. 밤중에 그렇게나 잠에 들기가 힘들더니, 너무 오랫동안 자버린 탓이었다. 

남은 시간: 11: 42

계획대로라면 5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배 안을 둘러보며 구명보트를 확인해야 하는 거였는데. 박문대는 침음을 흘리며 잠자리를 정돈했다. 가볍게 씻고 방에서 나와 처음에 입었던 후줄근한 옷을 입고서 자신이 입었던 정장을 귀족부인에게 돌려주고 나서야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남은시간은 열한시간. 

박문대는 갑판으로 나와 바다를 따라 배 위를 한바퀴 걸었다. 줄에 매달려있는 보트를 하나하나 세어보며 위치를 확인하고 있으니, 아무도 다가오지 않던 그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늦었네요. 아직도 자고 있는 줄 알았어요."
"... 조금, 피곤해서."
"이해해요, 어제 연회장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는거 봤거든요."
"둘러싸인거 알면서 구경만 했냐?"
"하하."

신재현은 손을 들어 입을가리며 웃고서는 박문대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그리고 자신이 미리 확인한 정보와 박문대가 갖고 있는 정보를 서로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배는 어디에 몇개가 있고, 어떤 상태이며 어느 쪽에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릴거라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두사람은 인적이 드문 곳까지 와있었다. 

"어제, 왜 그냥 갔냐."
"네?"
"어제 파티 끝나고 갑판에서 말야. 굳이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을텐데 네 약혼자를 따라가버렸잖아."
"음."
"이렇게 확인하고 이야기를 나누기엔 밤이 더 좋다는 거 알고 있잖아. 고분고분 따라갈 필요 없었다고."

박문대의 목소리에 짜증이 어리자, 신재현은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물론 밤에 활동하는것이 다른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더 좋겠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박문대는 필요이상으로 신경질적이었다. 

"왜 화가 났어요?"
"뭐?"
"지금, 화난 것 같아서요. 시간이 그렇게 모자란건 아니었잖아요. 피곤한 상태로 무리해서 움직이는 것 보다 휴식하며 생각을 정리하는게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

박문대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신재현의 말이 맞았다. 피곤한 상태로 배 위를 돌아보며 보트의 갯수를 확인할 바에야 피로를 회복하고 깨끗한 정신으로 작전을 세우는게 훨씬 나았다. 그럼에도 자꾸만... 어제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짜증이 치밀어오르는건 왜일까. 나보다 그를 선택한 것 같아서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잠시 후 박문대는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신재현 또한 다시 그린것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뭐랄까, 후배님이 질투해준 것 같아서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요."
"...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아까 얘기나 마저 하자. 이제 정말 시간 없으니까. 내가 알기로 사고가 발생하고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4시간. 이제 6시간 남았어."
"그런가요? 꽤 잘 알고 있네요. 이 영화 좋아했나봐요."
"어."
"저와 얘기 하면서도 볼 정도로? 어쩐지 묘하게 대답이 늦더라니. "
"알면 끊지 그랬냐."
"끊을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이제 정말 바빠질 테니까,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은 그때 뿐이었다고요."
"은근슬쩍 자랑하는거야, 지금?"
"하하하."

신재현은 즐겁다는듯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주차된 차 안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몸을 숨기고 침몰이니 탈출이니 떠들기 좋은 장소이긴 했다. 좁고 폐쇄적인 공간에 단둘이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 해야 한다는 점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사실, 지금 조금 들떴어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이 상황에 들떴다고?"
"네. 음, 이런 스릴을 즐긴다던가 하는 이상한 취향이 있는건 아니고요. 후배님과 이렇게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거에요."
"전에도 몇번 만난 적 있잖아."
"만날 때 마다 확실히 선을 그었고요."
"......."
"저 아직 미련 남았어요. 한번 제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까, 도저히 당신이 포기가 안돼."
"먼저 선후배 관계로 남자고 말한건 너였잖아."
"그랬죠.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요. 전성기를 달리는 아이돌이 연애라니. 말도 안되잖아요. 그것도 라이벌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자와."
"그래.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하겠다고 말했었지, 내가."
"너무 깔끔해서 저 사람이 정말 나를 좋아한게 맞긴 한건가 헷갈릴 정도였죠."

막힘없이 이어지는 신재현의 말에 박문대는 미간을 구겼다. 그렇게나 피하려고 하던 상황에 결국 돌입하고 말았다. 이래서 지금까지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을 피해온건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자 뒷목을 주무르며 박문대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둘사이에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아니, 자신만 그렇게 느낀 것 같다고 박문대는 생각했다.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있는 얼굴을 마주하니 저녀석은 오히려 이 상황을 기다려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잊어버려. 그땐, 취해서 실수했던거야."
"아."

박문대의 말에 신재현은 더욱 짙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취해서...." 라고 중얼거리며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좋은 술버릇은 아니네요. 취해서 고백도 하고."
"......."
"후배님은 잊어버리는게 쉽나봐요. 포기하겠다고 말한뒤로... 미련하나 없이 선을 긋는 태도에 저 조금 상처받았었거든요."

잔잔히 말을 이어가는 신재현의 이야기를 듣던 박문대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것을 느꼈다. 연애같은거 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느냐고 말해왔던게 누군데. 못들은 걸로 하겠다고 먼저 차갑게 선을 그었던게 누군데. 

"그래서 어디까지 선을 그을 수 있을지 당신을 시험하다가, 그제서야 나 또한 당신과 다를 것 없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묘하게 열기를 품고 나를 따라오던 시선, 그리고 차갑게 말하면서도 진심으로 밀어내지는 못하고 선 안쪽을 내어주던 당신의 행동까지 그 모든것들을 내가 당신에게 하고 있더라고."

머릿속이 아찔하게 휘저어진 것 같다고 박문대는 그 순간 생각했다. 저놈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거지? 나한테 지금 고백하고 있는건가? 왜?

신재현이 무릎위에 얌전히 올려져있던 박문대의 손을 쥐었다. 손가락 사이를 얽어 깍지를 끼더니 비스듬하게 내렸던 시선을 들어 다시 박문대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박문대는 말도 안되지만 그가 짓고 있는 부드러운 미소에 취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한번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가까이 다가가는건 신재현의 쪽이었다. 고개가 기울여지고, 서로의 숨결이 닿았다. 이제는 두사람을 방해할 불청객조차 없었다. 아무도 두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테니까. 5센티미터, 3센티미터... 점점 거리를 좁혀나가더니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꾹 다물고 있던 박문대의 입술이 신재현의 손길에 의해 천천히 벌어졌다. 파들파들 흔들리던 속눈썹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두 눈이 감기고 조금 더 깊이, 진득하게 입맞춤이 오갔다. 호흡을 위해 잠깐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각도를 바꿔 다시 맞부딪혔다. 어느새 박문대는 몸이 뒤로 밀려 숨듯 의자위로 누워있었다. 올라타듯 자신을 내리누른채로 입을 맞춰오는 신재현을 보면서 박문대는 어렴풋이 '이것도 영화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중인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박문대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것을 깨달은 신재현이 그의 혀를 깨물어 집중시키면서 생각은 깨끗하게 지워졌다.

"여유가 넘치네요, 다른 생각도 하고."
"시끄러워."

박문대는 더이상 선을 긋는 것을 포기했다. 적어도 이곳에서 만큼은. 신재현의 목 뒤로 팔을 두르고 그의 뒷통수를 감싸쥐어 가까이 끌어당겼다. 입술이 다시 진하게 겹쳐지고, 얽혀들기 시작했다. 가빠지는 숨소리와 덜컹이는 차안까지 모든것이 마치 꿈결에서 마주한 신기루 처럼 느껴졌다. 좀 더 솔직해져도 될거라고, 깨어나면 사라져버릴 꿈 같은거라고 생각하며 박문대는 신재현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한참동안 그렇게 서로를 탐하고, 이성을 되찾아 차에서 내려왔을땐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물고 빤 탓에 조금 부어있는 입술을 손등으로 내리누르며, 박문대는 신재현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가쁜 숨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빠르게 객실을 향해 걸었다.

타이타닉호가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약 8시간을 남겨두고 있었다.

.
.
.

"얘기 해봤어?"
"네. 소용 없었어요."
"... 역시 그런가. 이쪽도 마찬가지야. 빙하에 대해 말해도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위험성을 느끼질 못해."
"영화의 흐름을 바꾸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거겠죠."
"어. 그런 것 같아. 그럼 방법은 하나 뿐이네. 어떻게든 보트에 올라타 생존하는거."
"네. 그런데 후배님, 저는 어떻게든 보트에 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3등석의 잭은 어떻게 보트에 올라타려고요?"
"저번 파티때처럼 직전에 옷을 빌리던가 하면 돼. 혼란스러운 상황이니까 못알아볼거야."

박문대의 말에 신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흘끗 보았다. 빙하와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동안 사고를 막기 위해 아무리 발로 뛰며 노력해도 전부 소용이 없었다. 위화감이 느껴질정도로 이 배 위의 사람들은 사고의 위험성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헛소문을 퍼뜨려 혼란을 야기하려고 한다며 선원이 길길이 날뛰는 탓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두사람은 갑판으로 나가 정면을 보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파도떄문에 바다아래에 있는 빙하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사방이 고요하기만 했다.

신재현은 머지않아 자신의 약혼자에게 돌아갔다. 시종을 시켜 소란스럽게 불러대는 탓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신재현의 와작 구겨지는 얼굴이 꽤 볼만했지. 그렇게 신재현을 먼저 보내고, 전에 신세진 부인에게 한번 더 정장을 빌려 갈아입고서 방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쿵-

큰 충격과 함께 배가 출렁였다. 그리고 이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하자 사건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타이타닉호가 빙하와 충돌했다. 곧 물이 차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전에 옷을 빌리고 귀족행세를 하던, 때를 노려 먼저 배 위에 올라타던 해야했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누군가가 박문대의 어깨를 잡았다.

"어딜 가려고."

박문대를 잡은 사람은 로즈, 신재현의 약혼자가 부리는 시종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네가 목걸이를 훔쳤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시치미 떼도 소용 없어. 네가 그녀를 구슬려 목걸이의 위치를 알아내고는 훔쳤잖아!"

시종은 우악스러운 손길로 박문대를 제압하고, 질질 끌고갔다.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힘이 뭐가 그렇게 센지, 벗어나기는 커녕 도착할 때 즈음엔 몸에서 힘이 빠져 헐떡이고 있었다.

"주인님, 데려왔습니다."
"그래. 내가 이럴줄 알았지. 처음부터 목걸이의 존재를 알고 그녀에게 접근한거였어."
"아니...."
"이래서 너같은 녀석과 어울리지 말라고 로즈에게 충고한거였는데! 기어코 일을 치는군."

남자는 문대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는 것 처럼 행동했다. 당연하게도, 문대의 주머니에서는 목걸이가 나왔다. 우악스럽게 끌고오는 도중에 주머니에 넣은 거겠지. 도중에 발견했더라도 어떻게든 책임을 전가했을것이다. 시종인 남자는 문대의 재킷을 벗기더니 다른 이름이 쓰여있는것을 보며 이것또한 훔친게 분명하다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결국 박문대는 뺨을 맞고서 양손에 수갑을 찬 채로 1층의 어느 방에 묶여있어야 했다.

"젠장...."

박문대는 초조하게 시선을 굴렸다. 지금쯤 신재현은 갑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영화의 원작을 떠올리고 구하러 온다고 해도, 이미 늦을것이다. 물이 차오르는 속도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랐다. 벌써 발목까지 고이는 바닷물을 보며 박문대는 어쩔줄 몰라하며 시선을 굴렸다. 박문대는 자신을 비웃던 남자가 방을 나서자마자 요란스럽게 수갑을 부딪혔다. 혹시나 소리를 듣고 달려오는사람을 바라고 한 행동이었지만, 자신이 갇혀있는 방문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닷물이 차올라 허리부근까지 잠겼을 때,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열렸다. 잔뜩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신재현을 보자 마자 박문대는 안도하며 그를 불렀다. 당연하게도 진즉 상황을 파악했는지, 신재현은 한손에 도끼를 들고 있었다.

"미안해요, 바로 오려고 했는데 귀찮게 붙잡는것들이 방해를 해서."
"알았으니까 빨리 이거좀 끊어줘. 물이 차오르는 속도가 빨라. 곧 이 방도 잠길거야."
"네, 손 뻗어요."

박문대는 수갑을 찬 두 손을 쭉 내밀었다. 혹시나 손을 자르진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그의 운을 믿기로 했다. 다행히 손끝하나 다치지 않고 수갑이 잘렸다. 바닥으로 쓰러져 길을 가로막는 가구를 밀고 방을 벗어나 복도를 달리니, 어느새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다. 층계를 올라 사람들과 함께 가로막힌 문을 부쉈다. 배의 갑판위로 올라가자 마자, 박문대와 신재현은 미리 봐두었던 보트의 위치를 확인하며 뛰었다. 그러나 이미 꽤 늦었는지, 3분의 1의 배들이 물 위에 떠 노를 젓고 있었다. 이렇게되면, 섣불리 배 위로 뛰어드는것도 어렵다. 자칫하다간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일단, 가자. 넌 신분이 있으니까 보트위에 올라탈 수 있어."
"같이 가요."
"먼저 가. 난 알아서 방법을 찾을테니까. 원작 기억 안나? 같이 있으면 네 약혼자가 우리를 죽일것처럼 쫓아올거야. 차라리 따로 가는게 더 쉽지 않겠냐. "

박문대는 자신을 믿으라며 신재현을 사람들 사이로 밀었다. 그 혼란스러운 환경속에서 신재현이 잠깐 머뭇거린 사이 인파에 이끌려 그가 점점 멀어졌다. 신재현이 저쪽에서 계속해서 박문대를 불렀지만, 그는 못들은 척 등을 돌렸다. 박문대는 자신이 늦지 않았길 빌며 다시 객실이 있는 쪽으로 달렸다. 박문대는 다시한번 상태창을 불렀다.

[돌발!]
상태이상 : '탈출이 아니면 죽음을' 발생!

['탈출이 아니면 죽음을']
타이타닉호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 까지 배에서 탈출해 살아남지 못할 시, '이방인'의 소멸. 

*선행조건. '대양의 심장'을 소지할 것. 

드디어 대양의 심장을 챙기러 갈 수 있다. 이미 객선 내의 구조는 전부 파악했다. 박문대는 곧장 1등급 선실내로 들어가 금고가 있는 방을 찾았다. 그러나 익숙한 구조에 기쁘게 달려갔지만, 박문대를 기다리고 있는것은 빈 방도, 금고도 아닌 로즈의 약혼자 칼 호클리였다. 

박문대는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그를 상대했다. 대양의 심장을 훔친 도둑이라며 박문대를 쫓는 칼 호클리를 피해 유연한 움직임으로 객선 내를 뛰어다녀야 했다. 어느새 물이 가슴부근까지 차올랐다. 막다른 길에서 더이상 숨을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판단하자마자 박문대는 아찔함을 느꼈다. 이렇게 죽게되는 건가. 실패하면, 원래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는걸까. 신재현 그녀석도.... 박문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억센 손길이 박문대를 끌어당겼다. 물속으로 잡아당긴 손길에 깜짝놀라 앞을 보니 신재현이 조금 화가난 듯한 얼굴로 박문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얼마나 물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더이상 미룬다면 탈출하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했는지 한참을 씩씩거리던 칼 호클리가 박문대를 포기하고 다시 갑판위로 올라갔다. 박문대와 신재현은 완전히 그가 사라질 때 까지 시간을 들이다가 인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너...!"
"저 지금 화 났으니까, 조용히 해줄래요?"

아슬아슬하게 물에 완전히 잠기기 전에 객실에서 빠져나와 갑판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곧 배가 부러진다. 박문대와 신재현은 갑판으로 나가자 마자 난간을 붙잡았다. 난간을 넘어서기 무섭게 배가 빠른속도로 기울며 일자로 곧게 섰다. 결국엔 이렇게 된 것이다. 원작과 똑같이.

"숨, 참아요. 그러기 힘들거란건 알지만, 내 손 놓지 마세요."

신재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 그의 손을 꼭 잡고서 박문대는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빠른 속도로 배가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빨려가듯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빠진 몸이 물속으로 당겨지는 것 같았다. 
박문대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 짜낼 기세로 신재현의 손을 움켜쥐었다. 빠르게 가라앉던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마자, 단단히 붙잡은 손과 함께 수면 위로 헤엄쳤다. 

-촤악

물소리와 함께 박문대가 수면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움켜쥐고 있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뺨 위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남자는, 신재현이었다. 원작과 다르게, 박문대는 신재현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기적처럼. 기뻐할 새도 없이, 박문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수면 위를 부유하는 사물들을 살폈다. 이내 머지않은 곳에 커다란 문이 떠다니고 있는것이 보였다. 그것을 끌어와 신재현에게 올라가라며 눈짓했다. 그러나 신재현은 오히려 박문대의 허리를 잡아 올리며 부유물 위로 그를 이끌었다.

"야!"
"부탁이니까 거기 있어요. 당신이 숨기고 있던것에 대해 묻지 않을테니까. 제발."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려던 박문대는 애절한 신재현의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화가난 것도 같고, 울것 같기도 한 것 같은 표정. 신재현은 그가 내려올 수 없도록 몸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늘 내 예상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니까!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일이 술술 풀리는게 이상한 거였죠.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려고 했다니, 허튼짓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럼에도 당신의 말에 불만없이 따랐던건...."

쌓인 둑이 터지듯 신재현이 말을 쏟아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을 믿고 있었는데 왜 당신은 나를 믿지 않느냐고 화를 내고 있었다. 혼자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면서 소리치는 신재현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내게 총이 겨눠지는 그 순간을 본 것이 신재현에겐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이성을 잃고 횡설수설 말을 잇는 그의 뺨을 잡아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겹쳐 그의 입속에 맴도는 말들을 훔쳤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입술을 맞대고 있는 것 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는지, 거칠게 흔들리던 신재현의 눈동자가 차분해졌다. 넘치듯 쏟아지던 말이 멈추었다.

"알아, 미안해. 혼자 움직이는게... 더 나을거라고 생각해서..."

차갑게 식어가는 손을 문질러 열을 내고서, 네 얼굴을 감싸쥐었다. 체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주변은 아비규환이었고, 선행조건인 목걸이를 가져오지 못한 탓에 우리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져가고 있었다. 박문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절망적인 상황이 닥치고 나서야 신재현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사실은, 나도 좋았어. 잠깐이지만 둘이서 함께 한 시간이. 그래서 역시 내가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어."

너와 달빛 아래서 시선을 나누었던 것도, 손을 잡고 키스했던 것도 전부 행복했노라고, 네가 했던 고백에 기뻤노라고 박문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올려다 보고 있는 신재현에게 속삭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은 고요해져갔다. 그러나 박문대는 생명이 꺼지며 바닥으로 침잠하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사물이 가라앉으면서 물이 일렁이는 소리, 물거품소리와 딱딱하게 얼어붙는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도. 
신재현은 자꾸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 그런 그를 불러 잠에서 깨워도 금방 다시 눈을 감았다. 자리를 바꾸자고, 물 위로 올라오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신재현은 고집을 부리듯 물 속을 고집했다. 머리카락과 속눈썹에 성에가 끼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즈음, 신재현은 손을 들어 박문대의 눈앞에 쥐고 있던 것을 올려놓았다.

"이거, 당신에게 줄, 게요. 그 사람에게 심술 부리려고. 가지고 있었어요."

혀가 굳어 어눌해지는 발음으로 신재현은 말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던것도 같은데, 눈물이 자꾸 시야를 가리는 탓에 박문대는 눈을 자꾸만 문질렀다. 

"영화에선, 남자주인공이... 죽잖아요. 그 결말...이번엔, 달랐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살아줬으면...."

그의 나긋한 목소리가 자꾸만 작아졌다. 반짝이던 눈동자도 자꾸만 감겨드는 눈꺼풀 탓에 가려졌다. 어느새 혼탁해지는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박문대가 신재현을 불렀다. 

"어, 알겠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자지 말고 버텨봐.  곧 구조대가 올거야. 신재현, 듣고 있어?"

박문대가 신재현의 팔을 잡아 당겼다. 무게로 인해 판자가 기울면서 위에 올려져 있던 물건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신재현에게서 생명이 꺼져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멎고 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시간: 0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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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시간: 00:02 
남은시간: 00:01
남은시간: 00:00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저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른어른 움직이는 빛무리가 보였다. 드디어 구조대가 왔다고, 그렇게 말한 순간, 박문대는 갑자기 귓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찰나, 박문대는 정신이 아찔하게 물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라앉고, 가라앉아서 캄캄한 바닷속으로 침잠해가던 정신이 어느순간 물 밖으로 튀어올랐다.
.
.
.

"....!"

박문대는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텔레비전에서는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문대는 휴대전화를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하고 계속해서 이어지던 신호가, 어느순간 툭 끊겼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으로 박문대는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후배님? 잠든 거 아니었어요?]

전화 너머의 음성을 듣고 난 후에야 박문대는 멈췄던 숨을 터뜨리듯 내쉬었다. 꽁꽁얼어붙었던 혈관이 녹아 이제야 피가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

[나 보고싶어서 전화했어요?]

"응."

[......이상하네. 혹시, 어디 아파요?]

"아니, 멀쩡해."

[...뭐, 그래요.]

"신재현."

[네, 후배님?]

"사랑해."

[...... 지금 거기로 갈게요.]

"오지 마. 내일부터 바쁘잖아. 아까도 간신히 짬 내서 전화한 거라며."
 
[제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었던가요?]

"응, 했어."

박문대는 누군가가 덮어준 이불을 움켜쥐고서 다시 소파에 몸을 뉘이면서 이제는 익숙해진,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그의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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