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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320화까지의 간접적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 소재 주의

 감긴 눈을 뚫고 밝은 햇살이 정신을 깨웠다. 밤새 열려있던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 바람따라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허전하다. 등을 따뜻하게 안았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 왼팔을 뻗어 매트리스를 훑었다. 남아있는 온기도, 몸무게로 눌린 자국도 존재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없는 아침을 맞이하는 것일까봐. 잠결에 들었던 마지막 목소리를 기억 속에서 더듬더듬 찾아내었다.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나라도 더 많이, 기억하고 싶었다.

"안녕, 내일 보자."

보이는 건 텅 빈 방뿐이었다.

지금, 마법처럼 갑니다

w. 비피(@BiPi_M)

 박문대에게 연락이 온 건 이 주 전이었다. 이틀의 날짜만 적혀있는 메세지를 받고 처음 든 생각은 예능 게스트 섭외였다. 이런 건 보통 소속사에서 할텐데, 생각하면서도 손가락은 시간을 낼 수 있다 답장을 적고 있었다.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다음 메세지가 도착했다.

 

[여행가자.]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먼저 제안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박문대는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여행을 가자고 말한 적이 없었다.

[어디로요?]

[강원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미 예약까지 다 했나본데.]

[그래서 안 가?]

[가야죠, 처음 문대 씨가 이야기한 건데.]

 여행을 위한 짐을 싸니 작은 캐리어 하나가 가득 찼다.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한 날, 차를 끌고 테스타 숙소 앞까지 간 신재현은 가벼운 박문대의 옷차림에 당황했다. 작은 백팩이 짐의 전부였다.

"그것만 갖고도 충분하겠어요? 아니면 내가 다 챙겨올 거라는 믿음인건가?"

"안 빌려줘도 돼."

"흠? 보니까 잠옷이랑 세면도구 정도만 챙긴 것 같은데."

"중요한 거 아니잖아?"

"오늘따라 까칠하네요, 문대 씨."

 작은 가방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박문대는 짐을 신재현의 손에 맡기고, 보조석에 몸을 실었다. 트렁크에 가방을 두면서 슬쩍 가방 안을 열어보니 있는 거라곤 잠옷 바지 하나와 처음 보는 검은 공책, 칫솔과 치약이 전부였다. 내용을 확인해볼까, 하는 순간에 차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가다가 해 지겠다."

"네, 가요."

 물어보면 알려주겠지 안일한 마음에 책은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차에 돌아와보니 박문대는 이미 네비게이션에 경로도 검색해 띄워놓고, 노래도 틀고, 뒷좌석에 놓여있던 목베개까지 벤 채 앉아있었다. 재촉하는 눈빛에 차는 그대로 강원도로 향하는 길 위에 올라섰다.

 가는 길은 조용했다. 학생들에게는 시험기간이었고, 직장인들에게는 평일이었고, 출퇴근 시간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었기에 도로 위에는 가끔 지나가는 화물차만 보였다. 차 안은 박문대가 커버했던 청려의 '별보라'가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대 씨."

"왜."

"꼭 강원도여야 해요? 서울이나 경기도도 좋은 데 많은데."

"그냥, 가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박문대의 눈동자는 깊은 생각의 호수에 잠겨있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하는 건지, 아니면 이 여행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지, 신재현은 알 수 없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고속도로 위의 차는 앞으로, 앞으로 달릴 뿐이었다.

"출발할 때, 짐 뒤졌지."

"설마요."

"거짓말하지 마."

"진짜 안 열었는데."

"보지 마."

"안 봤어요."

"다 이야기해줄 거니까."

 거짓말을 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 연예계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는 거짓말이다. 적당한 진실과 허구의 정보를 섞어서 말하면 MC도 속고, 대중도 속는다. 그런데 도통 박문대만은 신재현의 거짓말에 속지를 않았다. 평소였으면 '거짓말해서 미안해요'라 말하게 만들고는 가볍게 꾸짖었을 터인데 이번만은 그러지 않았다. 무거운 말풍선들이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주려나 생각하다 고개를 틀어보니 박문대는 그 잠깐 사이 선잠에 들어있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난 날 중 가장 불안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흔치 않게 말을 중간중간 끊으며, 질문을 쏟아내던 모습이.

 다른 때보다도 더 깊었던 그날 밤, 신재현은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떴다. 허리 위로 느껴지는 박문대의 손길이 심상치 않았다. 창문을 바라보던 몸을 반대로 돌리니 공포에 질린 몸 하나가 있었다.

"신재현, 신, 재현?"

"으음, 네, 왜요..."

"너 맞지...? 나, 나 알지?"

"그럼요. 문대 씨."

"...그게, 다야?"

"...건우 형?"

"나... 나 살아, 있어?"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안아줄게요, 나 여기 있어요."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는 어깨 위에 두 손을 얹고 떨림을 가라앉혔다. 어둠 속에서 초점을 잃은 박문대의 눈동자가 보였다. 신재현은 특별한 말을 더하기보다는 그대로 안아서 등을 토닥여주었다. 자연스럽게 등에 두 팔을 감은 박문대는 귀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에 맞춰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어디... 가지 마."

 호흡은 훨씬 차분해졌지만 여전히 두려움은 숨과 숨 사이에서 뚝뚝 묻어나왔다. 무조건 살 수밖에 없는 방법을 썼음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초조해하던 지난 회차의 신재현들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의 청려를 모르는 과거의 청려가 앞에 있는 것처럼, 신재현은 한 마디 한 마디를 무겁게 전했다. 괜찮다. 지금은 행복하다. 과거에 이제는 파묻혀 살지 않는다. 미래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박문대가 신재현에게 희망의 씨를 심었듯 신재현은 그 씨앗에서 피어난 열매를 박문대 안에 묻었다. 그래서 신재현은 오만하게 생각했다. 제가 그 몇 마디에 무너지고 완전히 달라졌으니 박문대도 당연히 그리할 것이라고. 열매 안에서 새 싹이 자라 큰 나무가 될 거라고. 하지만 박문대는 남에게 털어놓지 않고 홀로 모든 것을 품어 그 씨앗이 썩어가고 있었다.

"옛날 생각 나네요."

"언제."

"문대 씨 상태가 지금 같았던 때?"

"몰라."

"그래요, 기억하지 말아요."

 '별보라'가 지나간 지 한참이 지난 스피커에서는 '마법소년'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멜로디에 맞춰 박문대는 가볍게 허밍하며 손을 까딱였다. 중간중간 녹음했던 더블링이 들어가기도 했고, 안무도 조금씩 어깨와 발로 따라했다.

"내일 만난 너를, 오늘 내내 생각해,"

"그건 무슨 의미예요?"

"뭐?"

 신재현의 질문에 규칙적으로 손잡이 부분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추고 하늘을 보던 두 눈동자는 옆을 향했다.

"뭐 시간이동, 그런 컨셉인가."

"어, 그래."

"그러면 우리 이야기네요?"

"마음대로 생각해."

 3초도 채 지나지 않아 박문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몸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콩이 이야기, 테스타 이야기, 브이틱 이야기, 자체 컨텐츠 이야기.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실타래 풀리듯이 시간을 채워갔다. 평소에는 계산하여 할 말을 정리하던 박문대의 모습은 신재현의 앞에서 사르르 사라지기 십상이었다. 반복재생을 깜빡했는지 노래가 끊겼다. 신재현은 다시 처음부터 재생하는 버튼을 눌렀다. 노래가 시작되면서 하늘에서 우르릉 소리가 들리더니 별안간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나봐요."

"결국, 이렇게."

"음? 또 무슨 의미예요?"

"...아니야."

 안 그래도 복잡한 박문대의 얼굴이 유난히 더 어렵게 느껴졌다. 신재현은 굳이 더 취조하기보다 박문대가 말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낼 수 있게만 말을 이어나갔다. 박문대도 그런 신재현의 태도에 굳이 전의 발언에 대한설명을 더하지는 않았다. 늘상 해왔던 시시껄렁한 대화가 빗소리에 씻겨내려갔다.

 

 도착한 산장 주변에는 어떤 숙박자도 없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하늘에서 쏟아졌다. 두 사람도 모두 씻으니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산장에 왔으니 고기는 구워먹어야하지 않겠나, 생각했던 계획이 망설임없이 삭제되었다. 별안간 신재현은 이렇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거실 바닥에만 누워있을 거면 강원도까지 온 보람이 없겠다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산 속 깊이 여행을 왔으면서까지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요?"

"몰라. 뭐 하지?"

"웬일로 아무 계획없이."

"어떻게 365일 24시간을 계획대로 사나. 무계획적인 날도 있는 거지."

"내가 아는 문대 씨 맞아요? 새롭네요, 이런 모습."

"그러면 저녁이라도 먹을래?"

"아, 일어나기 싫다."

"나도 그래."

"그냥 넘길까요.”

 박문대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신재현도 굳이 말문을 트려고 하지 않았다. 말이 많지 않은 두 사람이 또 입을 움직이기에는 서울과 강원도 사이의 거리가 많이 멀었다. 틱, 틱, 시계바늘 소리만 울렸다.

"내가 왜 오자고 했는지 물었었지."

"말해줄 생각이 없었던 거 아니예요?"

"이미 알고 있잖아. 내가 결국 말하게 될 거라는 거를."

 천장을 바라보던 박문대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 누우면서 신재현의 얼굴을 향했다.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바람 불지 않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확실히, 그렇네요."

"공책도 봤지?"

"안 봤어요."

"본 거 다 말해. 안 그러면 죽도 밥도 없어."

"가방에서 꺼내보기만 했어요. 처음 보는 거라. 안에는 정말 안 봤어요."

"내일 읽어봐."

"읽어? 편지인가."

 박문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이어 웬만한 일로는 충격받지 않는 신재현을 굳게 만드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내일의 나는 너를 몰라."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믿기지 않아도, 그냥 믿어."

"못 믿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됐다. 좀 복잡해."

 마음 속에 폭탄을 터뜨려놓고는 박문대는 아무 일 없었다는 양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옆에 쌓인 짐더미에서 소고기 팩을 꺼내들었다. 박문대 혼자 두기 싫었던 신재현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결국은 일어나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박문대가 가져온 작은 가방이 눈에 밟혔다. 내일 읽으라고 했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렴 상관없겠다 싶었다. 신재현은 그대로 가방을 침대방에 갖다 놓는 척 검은 공책을 몰래 펼쳤다.

책은 반복되는 Daydream의 기록.

 

처음에는 무시했고,

두 번째에는 오류라고 생각했고,

.

.

.

아홉 번째에는 수 갈래 길을 걸어도 결과는 같다는 걸 알았고,

.

.

.

이제야 끝을 받아들인다.

 

 

비현실로 점철된 우리의 인생이기에

내 마지막이 두렵지는 않아.

 

그저 조금 더 걸어야 할 신재현,

쓰러지지 마.

 

기억 못할지언정,

내가 마법처럼, 갈 거니까.

 다음 장을 차마 넘길 수 없었다. 첫 장부터 다가오는 박문대의 생각 하나하나가 묵직한 말풍선이 되어 신재현을 미친듯이 압박해왔다. 박문대가 우려했던 '그 날'이, 내일이겠지. 내일이 오면, 무슨 짓을 해도 변하지 않는 결과가 펼쳐질 거고, 아마도 신재현도 박문대가 그랬듯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신재현은 뒤늦게 내일 읽으라는 말을 듣지 않음에 후회했다. 첫 장의 짧은 글은 결코 박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두 번째에는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홉 번째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끊임없는 반복은 한계의 벽을 한 단계씩 위로 올려 브이틱을 더 높은 곳으로 올려주었다. 마지막에는 정말이지 박문대를 만나서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행복했다. 이 부분이 신재현을 무너뜨렸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는 걸까. 왜 신재현의 결말은 행복이고 박문대의 결말은 불행일까.

"고기 먹어."

"혼자 벌써 다 했어요?"

"할 게 뭐 얼마나 많다고."

 방문을 나서기 전 화장실에서 손도 닦을 겸 거울을 바라봤다. 눈물은 안 흘렀지만 눈시울이 조금이라도 붉다면 박문대가 눈치채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가장 차가운 쪽으로 수도꼭지를 돌리고는 손도 얼 것만 같은 물로 눈 옆을 닦았다. 눈꺼풀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물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다. 박문대가 숨기고 싶다는데 굳이 그걸 들춰내고 캐묻는 것은 신재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강원도라 그런가? 물이 좋네요."

"그러냐."

"이건 뭐에요?"

"그냥 구우면 기름지니까, 마침 찜기도 있더라고."

"오..."

"수육 식으면 맛없어. 양념도 해서 맛있게 먹으려면 지금 먹어야 해."

"잘 먹을게요. 번번히 실례하네요."

"됐어. 내가 하는 게 더 맛있으니까, 그 뿐이야."

 젓가락이 음식에 닿으며 나는 소리만이 식탁을 채웠다. 원래도 박문대는 말이 없었다지만, 신재현은 표정 관리에 집중하느라 그나마 하던 말조차 삼켜졌다. 결국 말을 꺼내는 건 박문대였다.

"표정 풀어. 넌 연기는 못 해."

"하하, 무슨 말인지 잘,"

"나도 눈치가 있지 네가 내 가방 뒤졌을 걸 모를 줄 알았어?"

"들켰네요. 노력했는데."

"그래서, 어디까지 봤는데."

"맨 앞 페이지. 이건 믿어줘요. 진짜 안 넘겼어요."

"왜 읽었어. 내일 읽으랬잖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저녁식사가 끝났다. 함께 설거지하자는 신재현의 요청을 박문대는 매몰차게 거절하고는 욕실로 신재현의 등을 떠밀었다. 찝찝하지만 운전의 피로도 풀고 몸에 밴 고기 냄새를 빼기 위해서라도 샤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안에 은은한 블루베리 향이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퍼져나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갔을 때 박문대는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지막히 문대 씨, 부르자 시선이 깜깜한 하늘에서 신재현에게로 돌아왔다.

"다 씻었어요. 문대 씨도 요리하고 설거지하느라 피곤할 텐데 씻어요."

"여기 앉아봐."

 가까이 다가가자 박문대 옆에 놓인 검은 공책이 보였다.

"말해줄게. 궁금한 거 있으면"

"문대 씨가, 왜 저를 잊어요."

"그래, 거기서부터 시작할까."

"내가 이제 싫어? 뭘 어떻게 하면..."

"신재현."

"네."

"앉아."

 없던 분리불안이 생길 것만 같았다. 신재현은 그만큼 박문대를 두 팔 안에 꽉 안은 채 앉았다. 하루이틀 껴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 상태로 책장은 넘어가기 시작했다. 신재현은 넘어가는 책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번째 페이지. '강원도로 가는 길. 건조한 가을 때 아닌 소나기.'

 우리 왔을 때 있었던 이야기네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여기에 적혀있다는 건, 문대 씨가 이전에 강원도를 갈 때 비가 왔었다는... 아, 맞다. 문대 씨는 면허가 없지. 아까 나에게 했던 말만 떠올리면 문대 씨는 아무래도, 미래를 보고 왔나봐요.

 

 세 번째 페이지. '고장난 뻐꾸기. 23시 42분에 다시 소나기.'

 날씨 예보에서는 비가 안 온다고 예고했는데, 기상청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네요. 지금 몇 시지... 이 말이 정말이라면 15분 뒤면 소나기가 와야겠네요. 그런데 문대 씨는 이걸 어디서 보고 온 건가요.

 

 네 번째 페이지. '산책로 중간 벤치? 우비를 입고 앉아있는 나.'

 여기 산책로가 예쁜가요. 우리 아침에 일어나면 같이 손잡고 한 바퀴 돌러 갈까요. 험하지도 않고,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은데 가볍게 아침 먹고 다녀와요.

 

 다섯 번째 페이지. '밥을 먹지 않는 나. 무서워? 불안해?'

 왜 밥을 먹지 않아요. 왜 불안해해요. 우리 함께잖아요. 문대 씨가 수십 번을 구르고 닳아 이제는 한 곳에 붙어있는 법을 모르던 나를 이렇게 붙잡았잖아요. 

 

"피곤하다. 자러 갈까."

 박문대의 말에 차마 '그래요'라고 답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있는데 어떻게 잠에 들 수 있을까. 승리만을 결과로 내놓는 신재현이지만 박문대 앞에서는 져주는 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좀 더 소파에 앉아서, 좀 더 많은 페이지를 넘기면서, 좀 더 깊이 박문대를 알고 싶었다. 신재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박문대는 공책을 덮어버렸다. 여기까지야, 선이 그어졌다.

"문대 씨 너무해요."

"미안."

"차라도 타줄까요? 침대에서 쉬고있어요."

"네 것만 타와. 난 괜찮아."

"레몬청 있던데, 두 잔 들고 갈게요."

 커피포트에서 포르르 물이 끓어올랐다. 마음 속 답답함도 함께 튀어나왔다. 괜히 초조해졌다. 오늘이 지나면, 정말 박문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니, 지금 찻잔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기만 해도 아무도 없을 것만 같았다. 어딘지 먼 과거,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있던 신재현이 얼굴만 바뀐 채 저 검은 공책을 써내려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추운 겨울 하늘을 발 디딜 곳으로 삼은 사람은 신재현 혼자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곳 산장에는 두 사람이 함께였다. 무엇을 해야할 지는 뻔했다. 붙잡아야 했다.

"문대 씨."

"어."

"여기, 한 잔 해요."

"괜찮다니까, 고마워."

 침대에 나란히 앉아서 차를 마시니 불안하고 초조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박문대와 함께 있다는 확신만으로도 신재현은 쉬이 평온해졌다.

"내일 산책할까."

"안 피곤하겠어요?"

"강원도까지 왔는데, 깨끗한 공기라도 맡고는 가야지."

"그래요. 같이 가요."

"검색해보니까 작은 놀이공원이 있다더라."

"문대 씨 무서운 거에 약하잖아요."

"대관람차가 생각보다 좋다던데."

"타고 싶다는 뜻이에요?"

 대답 대신 찻잔이 들렸다. 하아, 차의 열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꼭."

창 밖에서 들리던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톡, 토독, 톡, 쏴아아. 신재현은 핸드폰 화면을 켰다. 11시 42분, 공책에 적힌 그대로였다. 두 번째 페이지처럼 도로 위에서 비가 내렸다. 세 번째 페이지처럼 지금, 비가 오고 있다. 그렇다면, 네 번째, 페이지, 도...

"신재현."

"우리 나가지 말아요."

"왜?"

"문대 씨가 적은대로 이뤄지는 게 싫어요. 왜 거기 앉아있는지, 왜 밥을 안 먹는지, 왜 불안한지, 알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래. 나가지 말자. 불 끈다?"

"내가 끌게요. 누워있어요."

 전등이 꺼졌다. 스위치에서 침대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혹여나 박문대가 그 사이 사라져있지는 않을까 신재현의 생각은 복잡했다.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가 박문대의 등을 품 안에 꽉 안고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관람차 타러 가야겠어요, 우리."

"...그래."

 활동이 격했던 탓일까, 운전이 피로했던 탓일까,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눈꺼풀은 너무도 무거웠다. 귓가에 박문대가 말하는 몇 문장이 맴돌았다.

"너무 슬퍼하지 마."

"그래도 나는, 나니까."

"안녕, 내일 보자."

 하지만 그만 들어가지 못하고 흘러나왔다.

 

 신재현이 잠에서 깼을 때는 방 안에서 느껴지는 거라고는 자기 자신이 유일했다. 문만 열면 숙소에서 챙겨온 짐가방이며 박문대가 설거지했던 찜통이며 밖에서 들리는 자연의 소리까지 그대로인데 오로지 침대 위에 존재했던 박문대의 온기와 자국만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문대 씨."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낙망하여 미친듯이 깊은 곳으로 잠수하는 마음에 무거운 추를 달아 빠르게 가라앉힐 뿐이었다. 아플 거라면, 아픈 시간만이라도 줄이기 위해. 기억을 되짚어도 떠오르는 건 거의 없었다. 잠에 빠지기 직전에 박문대가 무슨 말을 했던지, 요술이라도 부렸는지 한 문장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녕, 내일 보자...

 

 전날 차를 마시며 박문대는 관람차를 타러 가자고 했다. 그곳에 가면 무슨 흔적이라도 있을 지 모른다. 창 밖으로 빗방울을 맞고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창가에는 다섯 번째 페이지까지 읽었던 검은 공책이 놓여져있었다. 분명 마지막에 이걸 읽고, 여기에 두지 않았던 것 같은데. 표지를 가볍게 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이야기는 5쪽 그 너머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신재현을 위한 글은 아니었다. 더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로 보이지는 않았다. 우산을 들고, 신재현은 저 멀리 나무 위로 보이는 관람차를 향해 달렸다. 붙잡는 데에 실패했다면 되찾기라도 해야 했다. 어제만 해도 보고 싶지 않았던 풍경이 이제는 신재현에게 가장 간절한 순간이 되어있었다.

 숨이 벅차오르고, 점점 놀이공원 입구가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최소한의 관리로만 운영되고 있는지 들어가지 않으면 운영되고 있는지도 모를 풍경이었다. 가픈 숨을 가다듬고 한발 한발 안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놀이공원이 아니라 숲 속 오솔길과 같은 풍경이었다. 입구에 원래 여러 가판대가 있었던 모양인지 벤치들이 몇 군데 놓여있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분명 네 번째 페이지에, 산책로 위 벤치에...

"문대 씨?"

 등만 봐도 영락없는 박문대였다. 부름에 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깨 위에 손을 올리자 그제야 박문대는 고개를 틀어 신재현을 마주했다.

"어? 청..."

"...문대 씨?"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 저는 문대 씨가 아니라..."

"그럼 누구신데요."

"저는... 어, 저는."

 

 누구보다도 표정 관리를 잘한다, 그것이 신재현이 아는 박문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흔들리는 눈동자로 모든 내면을 내비치는 박문대는 마주한 적이 없었다.

"여기 계속 계시면 감기 걸려요. 내려가요."

"청려가 왜 여기에."

"가실 곳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모셔다 드릴게요."

"...아뇨, 없습니다."

"정말 걱정되어서 그래요. 물기라도 말리고 가세요."

"그렇다면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물로 흠뻑 젖은 우비는 벗기고 그 위에 큰 우산을 씌웠다. 얼마나 긴 시간동안 앉아있었는지 차갑다 못해 싸늘해진 박문대의 손을 잡고, 신재현은 따뜻한 숙소로 향했다. 처음 단 둘이 한 공간에 있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에도 박문대의 손은 죽은 듯이 잠잠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몇 마디를 건네보았지만 우산 위로 쏟아지는 우레와 같은 빗소리에 파묻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외투는 거기 걸어둬요."

"네, 감사합니다."

 역시나 '박문대'가 아닌 것 같은 어투에 신재현은 멍하니 박문대를 바라봤다. 많은 생각이 담겨있는 듯한 표정, 군더더기 없는 몸의 움직임, 단어 선택까지도 닮았지만 사람들과 맺어온 모든 인연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신재현은 화장실 문을 열고 현관 옆 옷장에서 새 수건을 꺼내 주었고, 박문대는 '감사합니다' 한 마디와 함께 문을 닫고 들어갔다. 갈아입을 옷이 없겠다는 생각에 박문대가 챙겼던 가방을 열었더니 전날 박문대가 입고 왔던 바지 한 벌이 곱게 개어져있었다. 고개를 문 밖으로 내민 화장실 문 앞에는 잠옷이 놓여있었다. 남는 상의가 없었기에 우선은 어제 박문대가 입었었던 바지 한 벌을 잠옷 옆에 두었다.

"다음이 뭐였더라."

 어느새 공책에 적힌 내용대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정해진 길로 걷는 일은 신재현에게 너무도 쉬웠다. 아이스박스에 담아온 반찬들을 접시에 담고,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햇반은 지겹다는 박문대의 말도 한 번 떠올려주고, 챙겨온 찻잎을 티팟에 우리고, 식탁 앞에 앉아 화장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집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씀부터 드렸어야했는데, 제가 그만."

"아니에요. 앉으세요,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배고프실 것 같아서요."

"...괜찮습니다."

 의자에 앉기까지는 했지만 박문대는 수저를 들지 않았다. 밥 위에 박문대가 좋아하던 냉이무침을 얹어도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신재현이 말을 꺼내려던 순간, 어디선가 꼬르륵, 소리가 났다.

"......괜찮습니다. 정말."

"혹시 제가 부담스러우신가요?"

 박문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구나, 정말 후배님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구나. 억지로 먹였다가 체하는 모습을 보고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정말 배고프면, 자신이 없을 때 혼자서라도 먹을 거라는 생각에 식탁은 그대로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은 11시에 빼야해요. 밥은 이대로 둘 테니 드시고 싶을 때 드세요. 문대 씨 짐은 저 방에 있으니까, 음, 쉬고 있어요."

"저기, 혹시..."

"네?"

"저를 아십니까?"

"가방 안에 문대 씨가 남긴 공책이 있어요.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이야기꾼의 역할은 '박문대'에게 넘겼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가 혼란스러우니 가장 차분했을, 이제는 없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신재현은 곧바로 방에서 짐을 꺼내어 옆의 작은 방으로 옮겼다. 주변이 조용하니 박문대가 무엇을 하는지 소리로 다 알 수 있었다. 팔락 소리가 날 만한 물건은 공책 외에 없었다. 공책의 뒷부분은 신재현이 아닌 박문대에게 보내는 편지였기에, 궁금하더라도 열어서는 안 된다는 의무 아닌 의무감이 지워졌다. 그는 인내에 도가 터도 너무 튼 사람이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어느새 11시까지 30분이 남아있었다. 신재현은 얼마 없는 짐을 챙겨 차로 향했다. 이미 차 앞에는 여행 첫 날과 다를 바가 전혀 없어보이는 박문대가 서 있었다.

"갈까요?"

"...그래."

 아까와는 달라진 분위기와 어투에 잠시 멈칫, 사고회로가 멈췄다. 방금 전만 해도 처음 본 사람인 것처럼 존댓말을 쓰고, 잔뜩 경계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박문대는 마치, 어제의 박문대가 돌아온 것만 같아서...

"그, 숨 막히는데."

"아, 미,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품 안에 가둔 박문대에게서 풍기는 향이며 온기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정작 박문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등 위에 두 손을 얹고만 있었다.

"타요. 돌아가야죠."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알맹이는 어디로 가고 박문대인 것처럼 굴지만 가면을 쓰고 흉내만 내는 사람에게 내가 무슨 주책을 하고 부리고 있는건가.

 차에 시동을 거니 끊겼던 지점부터 다시 노래가 시작되었다. '첫 시'였다.

"그래서, 문대 씨는 당신에게 무엇을 남겼나요. 아니, 이제는 당신이 박문대인가."

"......"

"나에게보다는 더 많이... 이야기해줬을 것 같은데. 항상, 문대 씨는... 나에게 쌀쌀했으니까."

"쌀쌀...했습니까."

"아니라고 하던가요?"

"그것까지는..."

"말하지 말라던가요?"

 박문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네, 덤덤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막상 마주하니 상처입은 것만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비상등을 켜고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요. 이런 문대 씨 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정말, 해도 돼?"

"반말을 할 거면 반말만 하고 존대를 할 거면 존대만... 그래요. 표정을 보아하니 반말은 어려운가 보네요. 전 괜찮으니... 말씀해보시겠어요?"

"특별한 말은 없었습니다. 그냥, 많이 사랑해주라고,"

"하."

"그게, 전부...였는데."

"문대 씨 참 잔인하네요."

 기억이 있어야 그걸 바탕으로 사랑을 쌓지 어떻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사랑을 주고 당당하게 보답을 요구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박문대가 평가한 신재현은 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잔인한 사람이었나 보다. 서운한 마음, 속상한 마음, 약간의 실망감, 표현할 수는 없었던 감정을 익숙하게 가슴 깊이 파묻고는 핸들을 돌려 다시 도로 위를 달렸다.

 

~내일 만난 너를 오늘 내내 생각해~

"어."

"?"

"이건..."

"......"

 

잠깐의 정적.

 

"신재현."

"미안한데 그렇게 부르지 말..."

"나야."

 

 나야- 이 한 마디가 뭐라고 사람 감정을 쉬이 울컥이게 만들었을까. 어느덧 고속도로에 올라 주변 잡음도 없이 달리는 차 안에는 '마법소년'이 퍼지기 시작했다. 박문대는 손을 뻗어 핸들 뒤 자율운전장치를 켰다. 익숙한 두 눈동자인데 방금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구름조차 잘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문대 씨?"

"관람차 타자고 했잖아."

 아, 박문대다. 벼락처럼 쏟아지는 안락감에 신재현은 두 팔을 뻗어 부서지듯 박문대를 안았다. 다시 놓으면, 이제는 정말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영영 '신재현'을 알지 못하는 '박문대'로 남을 것 같아서. 언제나 그렇듯 이 매정한 사람은 자신을 옥죄는 팔을 너무도 쉽게 풀고는 오른쪽 뺨에 담백한 입맞춤을 한다.

"왜 약속 안 지켰어."

"안 갔을 거잖아요."

"그래도 말은 했어야지, 꼭 가고싶어했다고, 같이 가자고."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공책의 마지막에 적어뒀었는데."

"제가 봤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봐도 날 위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서울 도착하면 봐보든가."

 노래가 클라이맥스로 향하면서 신재현은 오랜만에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래, 대상을 타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던 그 때 같았다.

"지금, 기분이 이상해요."

"어떻게 이상한데."

"마치... 서울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느낌."

"너도 느끼냐."

 노래가 끝나간다. 치솟는 박문대의 노랫가락에 따라 머리로 피가 쏠리며 불안감은 극점을 찍는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눈 밑에서 차오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신재현은 고개를 상대 어깨 위에 얹는 걸 선택했다. 어차피 울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지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물을 쏟아내는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예쁜 것만 보기에도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껴안고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짤막한 오르골 소리와 함께 노래가 끝이 났다. 쾅, 온 몸을 뒤흔드는 충격이 휩쓴다. 덜컥, 안전벨트가 걸린다. 콰득, 어딘가 부서진다. 신재현의 머리가 주르륵, 내려간다. 머리 뒤로 마른 배가 느껴진다. 등 뒤에서 가늘게, 하지만 거칠게 박문대의 숨결이 느껴진다. 안 돼. 아직 할 말이 많은데. 정말 많이 사랑했다고, 사랑한다고,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너를 만나고 비로소 하루하루가 즐거워졌는데. 네가 가면 어떻게 해.

"신, 재현."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들이 들린다. 중간중간 다급한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구급차는 늦게 오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안 죽어."

"무, 문대 씨. 말하지... 마요. 아프면, 안되니까."

"나, 한테도, 잘... 해줘."

 이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른다. 정말, 박문대는 죽지는 않았다. 뭐가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온갖 링거와 주삿바늘들에 호흡기에 온갖 봉투들을 달기 위해 관으로 몸에 구멍을 내니 목숨줄을 이어내기는 했다. 의사들은 의식만 회복한다면 아무 지장 없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테스타조차도 과격한 안무만 아니라면, 문대라면, 기꺼이 감당하고자 할 거라고 생각했다. 오직 신재현만 미래를 알고 있었다.

 박문대는, 더 이상 '우리'가 아는 박문대가 아닐 것이다.

 

 

 

 녕 '박문대'.

 ...공책의 맨 뒷장의 편지가 나 자신에게 쓰는 거라니, 무슨 판타지 소설 속도 아니고, 아. 판타지는 맞구나.

 지금쯤, 당황하고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된다.

 어디 가서 노래해야 한다, 춤춰야 한다, 일해야 한다, 요구하는 놈들이 있다면 전적으로 다 너에게 맡긴다. 나는 죽기 싫어서 한 거고, 하다보니 나름 즐거워서 한 건데, 너는 또 나랑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왠지 너도 나와 다를 것 없겠다는 강한 확신이 든다.

 잠시나마 몸을 썼던 사람으로서,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좋겠다. 신경 쓰이는 사람이 한 명 있어서. 지금 같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음 좀 잘 대해줘라. 사정이 나보다도 복잡한 놈이거든. 신재현이라고, 말 편하게 하면 돼. 숙소라는 곳에 가게 될 건데, 불편하면 얘네 집에 붙어살아도 돼. 표현이 서툴어서 그렇지 너를 많이 사랑해줄 거고, 네 맘에도 썩 나쁘게 들지는 않을거라 생각된다. 억지로 소개팅시키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 나를 사랑해줬던 사람이라.

 그리고, 미안하다. 몸이라도 건강하게 줘야하는데 아무래도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누가 알았겠냐. 체크아웃을 안 했더니 산사태가 나고. 미친 척 운전해보려 했지만 신재현이 뜯어말려서 결국 운전대를 넘기고. 매니저 부르려고 했더니 비 때문에 핸드폰이 쫄딱 젖어 먹통이 되고. 가는 길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국도를 선택했더니 최면이라도 걸린건지 둘 다 자버리고. 더 이상은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하나 없으니. 그저, 이 선택이 유일했다고 너에게 변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너는 나를 모르겠지만 이런 나라도 가엾게 여겨주면 고맙겠다. 아니면, 욕해도 좋아.

 

마지막으로 신재현,

이걸 언제 네가 볼 지 모르겠다.

사랑했다.

나 때문에 살기 시작했다면 내가 없어도 계속, 행복하게, 그렇게 살아줘라.

'나'는 없어도 박문대가 곁에서 널 지켜볼테니.

[ERROR!]

 

'상태창'의 '시스템' 과잉 개입. 회귀 이후의 모든 데이터를 제거합니다.

남은 시간 00D 00H 00M 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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